유 신 준 청양군 대치면 산업담당요즘 회자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절친논쟁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찌된 일인지 한쪽은 친구라 주장하고 다른 쪽은 아니라 부정한다.

이상한 건 그것뿐이 아니다. 수면아래에서 오갈 내밀한 이야기들이 실시간 방송으로 만천하에 중계된다. 진짜 친구라면 보호되어야 할 영역이 무차별 까발려지고 있는데도 둘은 태연하다. 친구가 이럴 수 있나.

서로 딴소리만 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이 딱하다. 소통이 가장 중요한 게 친구관계 아니던가. 불통도 이런 불통이 없다. 서로 다른 주장을 단편적으로 늘어놓기만 해서는 궁금증만 더할 뿐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사태는 이미 사람들의 입을 타고 사적영역에서 공적영역으로 훌쩍 공간이동을 해 버렸다. 보호받아야 할 프라이버시도 없어진 막장드라마다. 이제 남은 건 진실게임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걸 알아야 실마리가 풀리는데 정치권의 일은 주장만 난무할 뿐 제대로 진실이 가려지기 힘든 경우가 많다.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라도 빌어야 할까. 솔로몬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에게 아이를 둘로 나눠 가지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진짜 엄마가 아이를 포기했다. 엄마에게 아이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건 없었을테니까. 솔로몬은 결국 포기하는 여자가 엄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친구는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가 깨지면 더 이상 친구로 남지 못한다. 관계를 깨면서까지 얻어야 할 것이 있다면 둘은 이미 친구가 아닌 것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엄마처럼.

한 쪽에서 친구라 아니라고 부정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친구가 아니다. 친구란 상대가 필요한 관계니까. 그럼에도 다른 한쪽이 친구라고 주장하니 좀 더 살펴봐야 할 건덕지가 생겼다. 주장하는 그는 이제 우정을 소중히 함으로 스스로 친구임을 증명해야 한다. 정적의 처지임에도 상대방을 보호함으로써 둘이 친구임을 입증해야 할 입장에 처했다. 진짜 친구라 한다면 그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둘의 관계가 중요할 테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친구 아닌가. 이런 마당에 그는 관계가 만신창이가 돼도 친구를 물고 늘어진다. 아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자기 몫을 챙기려는 여자처럼.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친구라면 애당초 둘의 관계가 오픈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라면 사람들 입줄에 오르내리게 관계를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친구라서 진정한 걱정으로 해준 말이라면 어떻게 공개를 하겠는가. 둘의 관계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친구타령이다. 언어도단이다. 친구라면서 관계를 잃고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친구란 본래 이심전심의 관계다. 진짜 절친들은 쉽게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서로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들은 드러나면 사라지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마음속에나 존재하는 단어들이 그렇지 않던가. 그것들은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냥 믿어줘야 한다. 믿음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삶에서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쉽게 확인할 수도 없다. 사랑을 표방하는 관계에 사랑없고 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우정은 사라진다. ‘우리가 친구냐고 확인하면 이미 둘은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의심해서 확인하는 순간 관계는 깨져 버리는 이치다. 대차대조표 꺼내고 계산기 두드리기 시작하면 관계는 이미 물 건너 가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경우를 보면 친구와 정치는 양립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조합임이 분명하다. 정적(政敵)이라는 단어의 반대 영역에 정우(政友)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걸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서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정치를 만나고 싶다.

절친 논쟁을 보며 당신은 더 정치를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는 진짜 친구를 아는 사람을 골라 표를 줄 일이다. 절망하지 않는 오기가 그 혐오를 극복할 유일한 희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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