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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목사가 천안읍교회에서 목회한 지 3년째 되는 1938년은 한국 교회사의 일제 말기 수난사가 시작되는 해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끝난 후 전쟁체제를 갖추기 위해 종교분야에서도 강력한 통제를 추진하였다. 이에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 교육을 강화하여 1935년부터 기독교계통의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8년에 이르러 교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6.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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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신석구 목사는 1921년 11월 4일 금요일 아침 공덕리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2년 8개월 978일간의 징역살이를 한 것이다. 출옥한 사람들은 전에 살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신석구 목사는 갈 곳이 없었다. 감옥에 잡혀 들어가기 전 담임하였던 수표교교회는 이미 다른 목사가 부임해서 2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6.1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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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지는 밀알 하나가 되리라”고 각오는 하였지만, 투옥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13년 전 고향에서 친구 대신 몇 달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만, 정치범으로 독방을 써야 하는 이번 투옥 생활은 성격이 전혀 달라 불안과 공포, 절망과 고독이 점철되는 예측불허의 생활이었다. 예심을 받기 시작하고 얼마 않되 소위 ‘칠성판’이라 불리는 작은 상자에 갇히기도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6.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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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무청에 연행되자마자 일제 경찰은 심문하기 시작하였다.“어떠한 일로 독립하려 하였는가?”“선언서와 같다. 나는 조신은 조선 민족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일본이 약탈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고 생각하지마는 우리는 신에게 몸을 바치고 있으니까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지 않고 신의 마음으로 조선을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6.1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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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목사는 친구인 오화영 목사로부터 2월 20일경에 3.1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면 받았지만 즉시 답을 하지 못한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로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둘째는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여 즉시 대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4.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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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목사는 홍천에서 정식 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 1917년 9월 23일 원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10월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어 강원도 산골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식구들도 도시 생활에 큰 기대를 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신석구 목사 자신도 그동안 중단하고 있던 신학 과정도 마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신석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4.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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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0월, 전도사 면접에서 떨어진 한 달 후 권사로서 임지가 바뀌었다. 춘천지방 감리사로 홍천읍교회를 맡고 있던 히치 선교사가 그를 부른 것이다. 비록 부채 문제로 전도사가 되지 못하였지만 그의 신앙과 생활자세가 올바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개성을 떠나 홍천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는데 서울지방 감리사인 선교사가 서울에서 열린 ‘백만명구령운동’의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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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는 개종과 함께 전도를 결심하였다. 그는 34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1908년 3월 29일 주일에 개성 남부교회에서 선교사 왓슨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해 4월부터 감리교 협성성경신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협성신학원은 지금은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에는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순회하며 농한기를 기해 1년에 2~3달씩 집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조아라
2014.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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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는 ‘외래 종교’ 기독교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개인과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런 그에게 기독교는 도전이었고 장애물이었다.신석구가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고향 친구인 김진우의 끈질긴 설득도 있었지만, 새사람이 되어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동양일보
2014.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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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는 6일부터 격주 목요일 10면에 충북 청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 신석구 목사를 조명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를 연재한다. ‘조국의…’를 통해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자신이 진 십자가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충절의 고향 충청도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최천호목사의조국을위해십자가를진신석구
조아라
2014.02.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