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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묘하게 차갑고 말랐다. 김장을 부르는 날씨였다. 김장하는 날이면 늘 모이는 이웃들이 있다. 나는 성격에 따라 그들을 A, B, C, D라고 부른다. 그날, 108동 804호에 김장 바람이 일었다.A는 배추를 둥둥 씻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501호 귀머거리 할머니 말이야, 강남 아들네 가셨다더라?” B는 쪽파를 다듬다 말았다. “아까 택시에서 내리시는 거 봤는데? 어디를 갔다 온 건지…” C는 무를 ‘착착’ 채 썰며 보탰다. “809호 할머니는 손주 보고 싶다며 아들네를 자주 가신다잖아.” B는 생강을 다지며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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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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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인류의 공통분모다. 누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힘이 든다. 온전하게 욕망으로부터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적절한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 되기에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과 가정, 사회는 일정한 동력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음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욕구는 필수라고도 할 수 있다.문제는, 스스로의 자정작용이기도 하지만 욕망에 수반하는, 과다한 죄책감이다. 인간은 몸이 일으키는 많은 요구사항 중에서 욕망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기준치를 넘어설 때 여러 문제를 발생시킨다.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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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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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애들처럼 궁금한 게 많다. 요즘은 도널드 트럼프가 국가원수들에게서 받는 선물 중 대통령 개인의 소유물로는 몇 퍼센트를 보유할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지난달 29일 경주에서 열린 APEC 회담에 참석했던 트럼프에게 이재명 대통령이 왕관을 선물한 것에 이어 스위스에서 기업인들이 관세 협상을 위해 백안관 집무실을 찾아 협상 전에 먼저 탁자 위에 롤렉스 황금 탁상시계와 금괴를 올려놓았다. 이것을 저널리스트들이 사진을 찍어 공개했고, 선물값으로 39% 관세를 15%로 낮췄다.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 관세를 높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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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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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예비엔날레가 끝난 지 근 한달이 되어 간다. 하지만 큰 은혜를 입은 나에겐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폐막을 이틀 앞두고 성파선예전 명명백백에 연계하여 ‘우리 하나 되어 明明白白’ 스페셜 이벤트가 있다고 들었다. 선착순 100명만 참여를 허락한다기에 어렵게 신청했다.‘우리 하나 되어 明明白白’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신 성파 큰스님의 작품 안에 들어가서 시, 춤, 음악으로 작품 의미를 다시 표현하고, 큰스님의 법문과 명상을 통해 ‘하나가 되어’보는 감상과 체험을 하나로 하는 행사로 정리할 수 있다.11월 1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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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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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가 온다. 경서는 2, 3년에 한 번 귀국하곤 한다. 대학 때 잠깐 친하게 지냈다가 멀어졌는데 그녀가 호주로 이민 간 후 우리는 다시, 아니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돈독해졌다. 지난번 방문 때는 서로 바빠 겨우 딱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엔 적어도 두 번은 만나자고 우리는 벼르고 있다.우정을 나누는 데 거리는 상관없다. 더구나 요즘같이 인터넷 기술이 발달한 때에는. 나의 소울메이트 설화도 차로 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다. 사귄 지는 몇 년 안 되지만 속마음까지 통하는 친구 알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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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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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말하는 소리와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다. 침묵하다가도 가슴으로 어깨로 신호를 보내는 몸. 마음을 움직이고 온기를 불어넣는다. 원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 있다며 저 깊숙한 곳에 머무는 감각을 불러낸다. 이것은 사소함이 아니라 생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불완전한 몸이 나를 이끄는 그 틈에서 욕망이 피어난다.송복남의 장편소설 을 읽었다. 구한말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따라가며, 책을 덮고도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은 역사와 종교와 지성과 경제, 그리고 욕망을 엮어 하나의 세계를 재창조했으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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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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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조회에 들어간다. 교직에 들어선 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조회 전에는 머리를 매만지고 옷깃을 단정히 하고, 혹시나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바지 지퍼는 열리지 않았는지 점검하고 교실에 들어서려 노력한다. 별것 아닐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교직을 시작한 후 ‘처음처럼’이라는 필자의 마음가짐 중 하나이기도 하다.‘조회(朝會)’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벼슬아치들이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이라고 되어있다. 물론 필자가 임금은 아니지만, 요즘 고등학교에서의 조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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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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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만물의 근원이다. 농작물도 햇볕을 받고 자란 작물과 그렇지 못한 작물과는 천양지차다. 인간 생활이나, 생명을 가진 만물에게 햇살은 곧 생명(生命)인 것이다.어느 부족 국가에서는 아침 해가 뜨기 전 모든 마을 사람이 ‘오늘도 변함없이 해가 뜨게 해달라’는 원념(遠念)을 담아 해가 뜨는 동녘 하늘을 향해 풍악을 울리고 나아가다가, 해가 솟은 후(後)에야 마을로 돌아와 아침을 먹은 후 그날의 일상생활을 시작한다고 한다.나는 1978년부터 1984년까지 6년간 진천 백곡초등학교 명암분교에서 주임으로 직원 3명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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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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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 작가가 쓴 이라는 책을 읽었다.1996년생인 작가가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와 일용직으로 일하는 엄마랑 같이 가난을 이겨내며 살아온 자전적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어른들의 무심한 행동이 ‘국민기초생활 수급자’로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기도 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다행히 ‘안온’ 작가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가난이란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글 속에 적었다.나는 책을 읽는 동안 10년도 훨씬 전에 ‘조손가정 아이들 돌봄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어린이들을 떠올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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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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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달력 앞에 서 있습니다. 십일월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시간과 마주하는 달입니다. 거리를 두고 쫓던 앞사람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남기는 뒷모습. 역광의 그림자를 그리며 이내 산 저쪽으로 사라지는…. 바쁜 걸음으로 따라가지만 볼 수 없어 마냥 아쉬운…. 십일월은 한 해의 끝자락이면서 가을을 마무리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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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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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서리가 내리면 시들거나 색이 변하며 생육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감자, 고구마, 고추 같은 작물은 서리를 맞으면 조직이 얼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수확 시기를 조절하거나 보온 조치를 해야 한다.서리는 보통 맑고 바람이 약한 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때 잘 생긴다. 이러한 기상 조건에서 지표면의 온도는 공기 온도보다 더 낮아지고, 이때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바로 얼음 결정으로 변하면서 서리가 형성된다.따라서 서리는 눈이나 비처럼 대기 중에서 떨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지면 근처에 응결되어 생기는 현상으로,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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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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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火)는 부당한 대우와 위협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매스컴과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분노를 유발하는 행위를 쉽게 접하면서 도덕적 분노(moral outrage)가 증가하는 사회다. 타인의 도덕적 위반을 목격하며, 내 도덕적 기준이 타인과의 불일치하는 괴리와 관계 갈등에서 유발되는 피로는 일상을 매우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직장에서든지,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주관적이고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이기주의의 만연에도, 타인의 이상행동은 나의 반영(反映)일 수도 있다며, 억지 해석하거나, 인내해야 하는 현실에서, 내적으로 쌓이는 화기를 처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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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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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 앞 단골 식당에서 사골곰탕 한 그릇을 사 왔다. 행사 준비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오히려 늦어 마음이 급했다.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국물 담는 걸 싫어하는 걸 잘 아는 사장님은 미리 얼려둔 것을 싸주셨다.곰탕을 불 위에 올려놓고 출근 준비로 분주했다. 이제 따끈한 국물에 밥 한 숟갈 말아 후딱 먹고 나가면 된다. 화력 좋은 가스 불에 진즉 팔팔 끓는 소리가 난 것을 잠깐 꺼두었다가 뚜껑을 열어보니, 와락 달려드는 하얀 김 사이로 외로운 작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난감하다. 투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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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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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구산은 앉아 있는 거북이 형상이란다. 물론 서 있는 거북이는 본 적이 없으니, 거북이는 모두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을 것이다. 그냥 거북산이라고 했다면 조금 생동감을 느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자는 거북의 등을 타고 올라간다. 오전까지 내린 폭우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고요하다. 그 고요가 더 마음에 들었다.증평 좌구산은 한남금북정맥의 최고봉이다.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상은 이름처럼 휴양에 적합하다. 휴양시설과 구름다리, 천문대가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근처의 삼기저수지의 안개와 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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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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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43회 충북문학인 한마당 축제가 열렸다. 첫날 단재교육연수원에서 충북문학관 개관식과 함께 시작된 문학인 축제는 다음 날 2025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이어졌다.연초제조창이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하여 14회째 열리는 공예비엔날레는 세계적인 규모로 발전하였다. 고인쇄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공예 전문 분야인 비엔날레 장소로 견고하게 틀을 잡았다.이번 공예전 주제는 ‘세상 짓기’다. 전시는 본전시, 청주국제공예공모전, 초대국가전 태국, 현대 트랜스로컬 시리즈 특별전 등 다양한 섹션으로 구성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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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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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장독을 내놓았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는데 베란다가 비좁아 이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아내는 장독을 계속 닦고 쓰다듬으며 안타까워한다. 어떻게 버려야 하나. 생각이 많아 보인다. 어떻게 버리든지 ‘버림’인 것이다.신혼살림을 시작할 때였다. 어머니는 우리 아파트에 오시면 예쁜 단지를 사오셨다. 살림을 장만해 주시는 것이다. 좁은 열세 평짜리 아파트 베란다에 장독이 서너 개나 들어앉았다. 부자가 된 듯했다.이른 봄이 되면 잘 띄운 메주를 가지고 오셔서 장을 담그셨다. 소금을 풀어 계란을 띄워서 농도를 가늠하는 것부터 아내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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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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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은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꽃들이 피어난다.묵정밭 둔덕에 잡초들과 어우러져 피어난 망초꽃 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모습이 가히 환상이다. 고요한 빛을 품은 망초꽃은 그저 잡초 같지만, 작고 여린 가지로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견딤의 상징이다.망초 꽃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몇 년 전 이맘때 일이 떠올라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그날도 휴일을 맞아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얀 망초꽃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들꽃을 좋아하는 내가 그곳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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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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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가 있는 티베트 여행을 다녀왔다. 조캉 사원을 탐방하는 날 아침,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일찍 출발했다.조캉 사원은 라싸 시내 중심에 있고1350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조캉 사원에는 석가모니 불당이 있다. 이곳에 있는 석가모니 12세 등신상은 석가모니가 생전에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금색에 한 손은 결가부좌하고, 다른 한 손은 대지를 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입구부터 광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광장에 도착하자 방송을 통해서 본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인파 속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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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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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우리 부부에게 둘째 아기 공주님이 세상에 선물처럼 오게 되었다. 첫째 아들 출산할 때도 정말 감격스러웠지만 딸은 어떻게 하면 예쁘고 소중하게 키워볼까 하는 아빠의 설레임이 정말 컸다. 저 작고 앵두 같은 입에서 “아빠 파스타 만들어 주세요”라고 한다면 난 그 애를 위해 밤새도록 요리할 자신이 있다.나는 요리사로서 첫째 아들 때부터 매일매일 특별한 이유식을 만들어 왔다. 이탈리아식 이유식이다. 내가 20대 시절 나의 스승님인 이탈리아인 파올로는 두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중이었는데 그가 직접 이탈리아식으로 이유식을 만드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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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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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과거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고 미래를 꿈꾼다. 완벽한 인간은 없거니와 인간의 본성이 미래지향적이라 누구에게나 과거는 아쉽고 미래는 불안하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곳을 향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고 눈물겹다.그러나 현실에서 얼마간의 성취를 맛본 사람들은 거기서 만족할 수 없다. 살얼음판 같은 세상 위에 지어 놓은 성공이라는 집이 경쟁자라는 방해꾼을 만나면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부숴버릴지 몰라 매 순간이 두려운 그들은 오늘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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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1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