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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8년 8월 21일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은 블라디보스토크(해삼) 신한촌에 거주하게 된다.이후 륙성촌과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러시아 한인문학의 태조(太祖)로 활발하게 활동한 그의 업적은 지난 2014년 10월 12일부터 2015년 3월 15일까지 동양일보에 연재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를 참조하면 될 듯싶다.2014년 9월 2일부터 11일까지 9박10일 동안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 선생의 족적을 찾아 다니며 기록했던 ‘조명희 답사기’에서 이미 많은 부분이 언급됐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5.1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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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8년은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한 해이다. 그러니까 포석은 1923년 2월 동양서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를 발간하고, 4월 8일 동명 32호에 ‘내 영혼(靈魂)의 한쪽 기행(紀行)’과 ‘아침’으로 문단에 나와 5년 남짓 조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망명했던 것이다.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포석이 조선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조선 최초의 창작희곡 ‘김영일의 사’를 쓰고, 최초의 조선 순회공연을 다녔다는 것이 포석의 첫번째 문학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포석은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5.0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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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병든 성운을 둘러싼 일행이 낙동강을 건너 어둠을 뚫고 건넌 마을로 향하여 가던 며칠 뒤 낮결이었다. 갈 때보다도 더 몇 배 긴긴 행렬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강 언덕을 향하고 뻗쳐 나온다. 수많은 깃발이 날린다. 양렬로 늘어선 사람의 손에는 긴 외올베 자락이 잡혀 있다. 맨 앞에 선 검정테 두른 기폭에는, ‘고 박성운 동무의 영구’라고 씌어 있다.그 다음에는 가지각색의 기다. 무슨 ‘동맹’, 무슨 ‘회’, 무슨 ‘조합’, 무슨 ‘사’, 각 단체 연합장임을 알 수 있다. 또 그 다음에는 수많은 만장이다.“용사는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5.0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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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성운이 고향에 돌아와 한 일은 선전, 조직, 투쟁이다. 농촌 야학을 설치하고, 농민 교양에 힘을 쓰고, 그네들 틈에 끼어 생일도 하고, 농사일터나 사랑 구석에 모인 좌석에서나 야학 시간에서나 기회가 있는 대로 교화에 전력을 다했다.또 소작조합을 만들어 대지주 동척의 횡포와 착취에 대항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소작쟁의에서 희생자도 내고 소작조합 해산명령도 받고, 노동야학도 금지 당한다. 동척과 관영의 횡포와 압박이 이루 말할 수 없다.성운의 친구는 밖으로 나가 테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성운은 “우리는 죽어도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4.2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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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박성운과 로자의 성격 속에 있는 혁명적 정열과 영웅주의 인도주의적 애정의 깊이와 미래를 확신하는 아름다운 낭만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촌에서 전개되는 투쟁의 온갖 고난성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낙동강’은 비극적 사건들로 충만되어 있으며 구슬픈 정서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곤란한 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쓰러진 혁명 투사의 뜻을 이어 투쟁의 더 큰 길을 걷기 위하여 북으로 떠나는 그의 애인 로자의 눈물 속에서 독자들은 다만 그들의 사업의 곤란성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을 하는데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4.1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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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낙동강’을 발표하자 김기진(팔봉)은 그 감격스런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소설이-문학이 있었던가. 이만큼 인상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모든 것을 보여준 눈물겨운 소설이 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의 생활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 조선-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없는 인생 기록이다.……이 소설이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개인의 생활 기록이 아니고 현재 생장하는 일계단의 인생을 기록코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놀라울 만한 수완은 작중의 개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4.0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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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그가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 사이 하나의 ‘공유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로 분류되는 포석은, 그러나 극단적이고 협착(狹窄)한 사상적 틀에 갇혀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지사(志士)로서의 면모로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그가 가진 그런 ‘사상적 여백’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섞이지 않을 듯했던 물과 기름의 관계를 융합시킬 수 있었던 큰 틀이 되었던 것이다.하지만 그런 ‘화학적 결합’은 언젠가는 깨질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3.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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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그 뒤에 나는 먼저 조선으로 왔었다. 군은 다니던 학교를 마칠 양으로 한두 해 동안 더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한두 해 동안은 서신도 잦지 못하였다. 군은 학교를 마치고 와서 집에서 치산(治産)하고 있더란 말을 풍편(風便)에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일시적 방편인가? 혹은 영구인가?’ 하는 의심이 나면서도 어떤 기대를 저버리는 듯싶어 분한 생각이 펄썩 났었다. 나는 곧 붓을 들어 심히 꾸짖고 욕하는 언사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군의 답장은 곧 왔다. 나의 편지를 보고 울었다고&hell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3.2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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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趙明熙君에게창작욕이 성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그저 지냅니다. 스트린드베리가 30대 때의 스웨덴의 사회적 분위기를 맛본것 같은 큰 걸작이 지금 일 소부르조아 가정 안에서 생활하는 내게도 돌아올 것이외다. 나는 숙명론자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할 줄 압니다마는 한 가지 이 how의 생활에서 내 가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요사이 실업(實業)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그러나 나는 나요! 겉으로 일 광인(狂人)에 지나지 못한 swedish dramatist의 생활을 난 흠모합니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3.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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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가장 친했던 벗 우진을 추억하며 쓴 포석의 글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은 당시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 정사’가 얼마나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지, 수산과 포석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고 포석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풀어내야 했는지, 그리고 삐뚤어진 매스컴으로 인해 포석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그래서 포석은 너무나 먹먹하여 묵히고 묵혀두었던 상처, 수산의 자살을 두고 따따부따 세상에서 떠들어댔던 선정적 이야기들에 대해 “그가 죽은 뒤에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과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3.0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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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작년 8월 4일에 수산(水山)이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과 그의 생전(生前) 일에 대하여 멋대로 지껄이고 멋대로 판단(判斷)을 내린다. 더구나 무근(無根)한 사실(事實)을 함부로 과장(誇張)하여 내어 놓는 신문 잡지의 기사란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을 만하였다.그런 지도 벌써 죽은 지 1기년(朞年)이나 되었다. 그렇건만 나는 이때껏 그의 일에 대하여 줄곧 침묵(沈默)만 지켜왔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그때에도 나의 생각과 감정(感情)이 몹시 착란(錯亂)도 하고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2.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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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5년 2월 1일과 3월 1일 포석은 개벽 56호와 57호에 소설 ‘땅속으로’를 연속해서 발표한다.4월 1일에는 같은 잡지 58호에 시 ‘어둠의 검에 바치는 서곡(序曲)’과 ‘온 저잣사람이’를 발표하고 신여성 4호에 시 ‘고향의 봄’을 발표한다. 6월 1일에는 개벽 60호에 시평 ‘나는 어럿케 생각한다’를, 7월 1일에는 시대일보에 수필 ‘생명(生命)의 고갈(枯渴)’과 개벽 61호에 시 ‘바둑이는 거짓이 업나니’와 ‘어린 아기’를 싣는다.8월 1일에는 개벽 62호에 시 ‘나에게 일반성(一反省)의 낙원(樂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2.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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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에피소드 3.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포석은 ‘추∼ 추우∼’ 소리를 내지르며 달리는 기차가 자신의 모습인 듯도 싶어 마음 한켠 착잡했다.열차의 소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서울 마포나루를 떠났던 것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강산이 한 번 바뀔만한 세월이었다. 옥죄어 오던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포석은 1928년 여름 조선을 떠났다. 떠날 때 포석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붙잡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더러운… 참 나쁜 놈들 같으니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2.1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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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한설야의 말에 의하면 1925년 당시 ‘생활상의 위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조명희 선생이었다고 한다. 포석에게는 남달리 많은 가족이 있었고 그 부양 능력은 오로지 조명희 선생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그러고 보면 포석은 조선과 러시아에서 두 아내와 7명의 자식을 두었던 셈이었다.포석에게는 당시 부인 민식과 장녀 중숙, 차녀 중남, 장남 중락이 있었고, 1927년 차남 중윤이 태어난다. 소련으로 망명한 뒤 재혼한 황 마리아와의 사이에 장녀 조선아와 장남 조선인, 차남 조 블라디미르까지 둔 것을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1.3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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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황동민 교수는 일본 유학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온 포석이 ‘남다른 곤궁과 기아에 처박힌 처지’에 놓여 있었음에도 “조명희처럼 주림을 잘 참는 사람도 없었으며 사흘동안 굶으면서 참는 것은 조금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고 포석을 잘 아는 동지들의 술회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그러면서 “(포석은) 시시로 닥쳐오는 기아를 참지 못하여 생활의 추악한 면과 타협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민의 기아와 고통을 영원이 없이하기 위하여 반드시 자본주의 착취 제도를 청산해야 한다는 신념에 도달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1.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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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5년 2월 개벽에 단편소설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포석은 시보다 단편소설과 수필쪽으로 관심이 방향을 돌렸다. 이로부터 포석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할 수 있는데, 김기진과 이기영, 최승일, 안석주, 염상섭, 최학송 등과의 교분을 나누면서 사상적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그해 포석은 이기영을 주선하여 조선지광에 취직시키고 카프의 맹원으로 가입하게 했다. 8월에 결성된 카프는 민족민중주의적 삶과 문학을 견지해 온 포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포석은 카프의 정치학습 그룹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6.01.1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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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1921년 7월 ‘동우회 순회극단’의 조선 전국순회공연 목적으로 쓴 한국 최초의 창작희곡인 ‘김영일의 사’를 발표한 이후, 그의 초창기 작품을 보면 대부분이 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23년 2월 동양서원에서 최초의 창작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펴냈고, 4월 8일 동명23호에 시 ‘내 영혼(靈魂)의 한쪽 기행(紀行)’과 ‘아침’을 발표했고 그해 11월 1일과 12월 1일 개벽 41호와 42호에 희곡 ‘파사(婆裟)’를 선보였다.본격적인 시 발표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낸 1924년부터 이뤄진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5.12.2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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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막심 고리끼는 1868년 3월 28일 출생해 1936년 6월 18일 사망했다.포석과 출생년도가 28년 차이가 나는데, 고리끼가 사망한 1936년은 소련작가동맹 맹원인 포석이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 거주하면서 그의 문학과 삶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리끼가 사망한(일설에는 스탈린에 의해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듬해인 1937년 9월 18일 포석은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KGB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2년 뒤인 1938년 5월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5.12.2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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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민촌 이기영은 포석의 첫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에서 수십편에 달하는 가장 우수한 시편들이 일제 경찰의 무참한 검열로 시집에서 제외됐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한설야도 일제에 문학으로 저항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포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아직 작품으로는 도저히 부르죠아 작가들과 대항할 실력이 없었다. 첫째 작품을 써대야 발표를 할 곳이 없었다. 우리들의 기관지는 왜경의 원고 검열에서 대부분이 먹혀 버려서 많은 작품을 실을 수 없었고 잡지도 압수되는 일이 많아서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우리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5.12.0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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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그러면서 포석은, 그 다양한 것들을 좇아가라는 말 대신 우리의 것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노래하는 것이 가장 우리다운 것이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하늘 높고 물 맑은 이 땅에 산은 물결 같이 구부러지고 길도 굽이굽이 감도는데, 이 산 저 산 넘어가며 우는 뻐꾹이가 바로 우리의 소리라는 것이다. 아침해가 봉우리에 솟고 자진 안개 흩어질 제 하늘 끝을 바라보고 우는 두루미가 또한 우리의 소리일 것이며,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혼은 마을 울 밑에 우는 닭이고, 우리 비애의 혼은 뻐꾹이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
김명기 기자
2015.11.29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