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교 진천소방서 화재조사주임

 세상에는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리는 참 많은 길들이 실핏줄처럼 흐르고 있다. 물과 물이 어울리면 물길이 되고, 풀과 나무들이 부대끼면 숲길이 되고, 누에고치의 비단이 만들면 동서양 문화가 만난 실크로드가 됐듯이, 길은 세상 모두에게로 이르는 열린 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운 이에게 달려갈 수 있는 길이 사랑의 길이라면 사람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길은 어떤 길이어야 할까?

어릴적 즐겨 읽었던 아라비안 나이트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이야기 편에는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우면 바위가 열리고, 닫혀라 참깨 하면 바위가 닫히는 도둑들의 보물 창고가 있었는데, 욕심 많은 알리바바의 형 카심이 도둑들이 훔쳐 놓은 보물이 가득한 동굴에 들어가서 보물을 훔쳐 나오다가 주문을 잊어 그만 죽게 되는 대목이 나온다. 예전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죄를 받는다는 그저 권선징악의 얘기로 치부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천직인 소방관이 되고부터 소방차의 잃어버린 길을 되찾으려는 욕심에 꽉 막힌 길에서는 열려라 참깨라는 요술 주문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우리 민족의 하늘을 연 단군께서 주창하신 건국이념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고, 모든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생명존중 사상에는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 조화의 정신과,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살생을 제한적으로 한다는 것만 보아도 생명의 고귀함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한민족의 생명존중 사상이 다시금 절박한 것은 소방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추진되는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소방차 통행로 확보시책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해 71일부터 소방공무원에게도 불법 주·정차에 대한 단속권이 부여된 이후 진천소방서에서는 지속적으로 단속 및 계도를 병행하고 있다. 분명 단속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만큼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소방통로라는 것이다. 소방통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화재가 관내에서 발생 했었다.

진천 중앙시장 내 가게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라이터로 불을 지른 화재가 발생했는데, 평소 진천소방서에서 중앙시장 상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소방통로 확보 훈련으로, 화재 당시 중앙시장 골목에는 불법 주·정차를 비롯한 불법 좌판이 없어 신속하게 소방차가 현장에 진입할 수 있었고, 더불어 중앙시장에 입주해 있던 한 상인이 소화기로 초동진화에 성공해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국민들의 성숙된 안전의식 중 단연 으뜸 덕목은 바로 소방차 통행로 확보로 국민들 스스로가 생명존중 실천에 다 함께 동참한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오늘도 나는 출근길에서 교통 신호등을 만난다. 빨강, 파랑, 황색, 화살표로 이루어진 단순한 표식이지만 그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 존재한다. 정지할 때와 출발할 때의 철저한 약속은 우리들의 안전과 직결 된다. 그 약속이 어긋나면 어김없이 질서가 깨어지고, 사고 라는 불행이 동반하게 된다. 이것은 소방차 통행로와 무관하지 않다.

소화전 주변 및 소방도로상의 불법 주정차 안하기, 굽어진 도로, 골목길 이중주차, 양면주차 안하기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설정한 최소한의 안전 라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안전 라인이 지켜진다면 각종 재난 현장에서 소방차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방관들의 탄식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이며, 아울러 열려라 참깨라는 유아적 상상 또한 하지 않을 것이다.

약속은 지켜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국민 모두가 성숙한 질서 의식으로 약속들을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 주변에는 행복하고 안전한 길들로 넘쳐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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