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영 자 수필가

 

 

가을이 무르익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아파트 정문 앞에서 큰 길을 바라보면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알록달록 가을 옷을 갈아입고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금세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여름내 초록 일색이던 가로수들이 저마다 노랑, 빨강, 갈색으로 물들어 자기 나름의 색깔을 창조하여 멋을 내고 있으니 나무들의 패션쇼를 보는 듯하다. 집 앞의 불무공원으로 나가면 수십 종의 나무들이 자기만의 색깔로 가을을 입고 서서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에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앞 큰 도로에는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파란 가을 하늘을 이고 금빛 잎사귀들을 팔랑팔랑 떨어뜨려 노란 그림자가 햇살 받아 더 곱다.

가로수들은 나무 중에서도 잘난 나무들이다. 어딘가에서 자라다가 뽑혀 왔겠지만 잘나지 않고는 그 위치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중의 왕자나 공주쯤이라 할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평범하거나 못난 나무는 산에 있는데 잘나다보니 큰 임무를 띠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니 그 나름의 고달픔은 있겠지만 보람도 클 것이다. 도시의 매연을 줄여주고 공기를 정화해 줄 뿐 아니라 여름에는 그늘을 드리우며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수분을 방출해 지표면 온도를 낮춰주기도 한다. 복사열을 차단하고 소음을 줄여주며 미세먼지를 흡수하는 것도 가로수의 몫이다. 거기다 아름다운 자태로 눈을 즐겁게 해주니 큰일을 하는 나무들이다.

강서의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으니 청주의 자랑거리로 나무들도 긍지를 느낄 것이다. 전국에 아름다운 가로수 길은 많지만 강서 가로수 길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가장 운치 있는 진입로로 모래시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길을 확장하면서 어떻게 가로수를 잘 보존할 것인가 전문가들의 고심이 뒤따랐고 시민들의 의견도 분분했었다.

지금쯤 커다란 나뭇잎들이 누렇게 물들어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한 잎 두 잎 떨어뜨리고 귀여운 방울들이 드러날 때이다. 이제 그 나무들을 시민들이 잘 보호하고 가꾸는 일만 남았다. 앞으로 가로수 훼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등 가로수 관리가 엄격해진단다. 가로수를 훼손하면 지금까지는 과태료 부과라는 행정처분만 이뤄졌지만 앞으론 형사처분도 가능해진다.

도심 속 산소탱크이자, 여름철 도심의 에어컨 역할을 하는 가로수들이 광고 플래카드에 묶여 있는 모습은 안쓰럽다. 가로수는 공해에 강하며 여름에는 잎이 많고 겨울에는 해를 가리지 않는 낙엽수여야 하고, 수형(樹型)이 아름다워야 한다. 양버즘나무·은행나무·버드나무·미루나무·벚나무·회화나무·이팝나무·벽오동 등이 적합하다고 한다. 심미적인 조망을 고려하여 가로수 심기를 시작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라고 알려져 있다.

엊그제 들른 가평의 캠프장에서 본 은행나무길이 자꾸만 떠올라 며칠 동안 행복했다. 은행나무 길이야 유명한 곳이 많지만 붉은 노을이 질 무렵의 아산 현충사 은행나무 길의 황금빛 터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가까운 곳으로는 우리고장 괴산 문광 저수지 옆의 은행나무 길을 잊을 수 없다. 지난 가을 글 쓰는 사람들과 그곳에 들러 아름다움에 반하여 해가 지는데도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던 일이 어제인 듯싶다. 올해 다시 가자는 말을 해 놓고도 실천에 못 옮기도 있는데 그새 황금빛 잎이 다 떨어져 버릴까 걱정이 된다.

5월에 본 전남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장관이었는데 지금쯤 그 나무도 잎이 누렇게 물들어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으리라고 짐작하니 다시 그 길로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담양뿐이랴. 하동의 십리 벚꽃 길의 그 환상적인 분위기도 가슴속에 오래 남아있고 그 벚꽃나무들은 지금쯤 꽃 못지않은 빨간 잎으로 화장하고 나와서 가을을 건너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 동창회 때문에 들렀던 충주의 사과나무 가로수는 어떤 가로수보다도 아름다웠다. 내 고향이라서 점수 몇 점 더 얹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탐스러운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귀물다움에 차창을 열고 사과나무야 사랑해.” 라고 속삭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자기의 고향인 영동의 감나무 가로수가 더 아름답다고 우기고 나는 충주의 사과나무 가로수가 더 아름답다고 우기던 일이 떠오른다. 둘 다 아름다운 게 사실이면서도 내 고향에 대한 애향심의 치졸한 발로였음을 이제는 인정한다. 햇살 고운 날 자전거를 타고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마음에 새기며 씽씽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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