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하루에 구백 명이 넘어졌단다. 눈 때문이다.

연말부터 쌓인 눈이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면서 얼어붙은 데다 그 위에 또다시 눈이 내려 겹치다보니 마치 설국에 사는 느낌이다.

산과 들에 쌓인 눈들은 보기엔 좋지만 생활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주택가 골목길 이면도로는 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음으로 코팅된 스케이트장 같고 언덕길은 눈썰매장을 방불케 한다.

만나는 이들마다 날씨가 화제다.

온난화라더니 왜 이렇게 춥냐, 옛날에 더 춥지 않았냐, 요즘엔 내의와 패딩이 대세라더라, 빙판길이라 차를 세워뒀더니 배터리가 방전됐다, 꼬리뼈를 다쳐 엉거주춤한 친구와 깁스를 한 친구의 미끄럼 사고담은 화제를 눈치우기로 돌렸다.

한 친구가 말했다.

공무원들이 뭘 하는 거냐. 전에는 눈이 오면 공무원들이 달려 나와 눈을 치우는 것 같더니, 요즘은 꼼짝도 않는다. 세금으로 사는 공무원들이 뭐하는 거냐. 눈길에 주민들이 다치는 것은 단체장 책임 아니냐. 그러자 공무원들에 대해 성토가 일어났다.

그때 다른 친구가 말했다.

눈치우기에 대해 조례가 있는 건 아느냐? 자기 집 앞과 점포 앞의 눈은 손수 치워야 한다는 조례.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건축물 관리자 등의 제설 제빙 책임 및 지원에 관한 조례라는 내용으로 눈치우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조례의 주내용은 보도나 이면도로, 보행자전용도로상의 눈 또는 얼음을 제거하는 작업에 대한 책임을 건축물 관리자나 소유자, 점유자에게 묻는 법으로, 주간에 내린 눈은 눈이 그친 때로부터 4시간 이내, 야간에 내린 눈은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치워야 하며 1일 내린 눈의 양이 10cm 이상의 경우 눈이 그친 때부터 24시간 이내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내용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조례로 제정은 해놓았지만 홍보나 교육이 미진한 탓이다.

눈치우는 데 무슨 조례까지 필요하냐. 오죽하면 조례를 만드냐. 그럼 누가 눈을 치워야 하느냐. 티격태격하는데 가만히 있던 친구가 말했다.

20043월이던가, 100년만의 폭설이라는 엄청난 눈이 내렸던때, 친구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눈치우기를 들려줬다.

청주시내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는 당시 오랜 외국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과 서먹서먹함으로 아는 사람도 없이 지낼 때인데, 주민대표가 함께 눈을 치우자고 방송을 하더란다.

친구는 바로 달려 나가 같이 눈을 치웠다고 했다.

넉가래와 비로 눈을 쓸고, 어떤 이는 삽으로 얼음을 깼고, 그 얼음들이 모여지면 손수레로 실어 날랐다고 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얼음을 깨고 눈을 치우고 아파트 마당을 말끔하게 만든 뒤 친구는 삼일 간 몸살로 누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덕에 친구는 아파트 통로의 모든 사람과 친하게 됐다고 했다.

전에는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마당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눈을 돌리며 멋쩍게 지나쳤는데 눈을 함께 치우고 난 뒤론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안부를 묻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은 눈치우기는 시민의 기본의무라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눈치우기가 사회문제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른은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도 조기청소라는 이름으로 새벽 거리청소를 했고, 집 앞이나 가게 앞이 더러우면 주인이 치우는 것을 어색하지 않게 보았다.

눈이 내리는 날, 온 가족이 함께 눈을 치우는 모습은 기억속의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바뀐 것은 아마도 우리의 주거문화가 아파트 생활이 주가 된 탓일게다.

아파트 눈치우기도 그렇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세대수가 얼마인가. 잠깐 같이 청소를 하면 금방 할 수 있는 것을 관리인에게만 맡기다보니 아파트 마당이 겨우내 빙판인 것이다.

물론 큰 도로는 국가가 치워줘야 한다. 그러나 내 집앞 눈을 공무원이 치워주고 나라가 치워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심이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는 내집의 페인트만 낡아져도 이웃의 고발로 고지서가 날아온다는데, 우리는 의무나 책임이 너무 약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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