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수 애 충북대 교수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비까지 내려 이대로 봄이 오려나 보다 했는데, 입춘이 지나고 폭설과 함께 다시 추위가 돌아오니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 터진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입춘 무렵에 반드시 늦추위가 찾아온다는 뜻으로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말도 있다. 요즘 며칠 날씨가 풀리더니 입춘 추위를 보며 절기가 주는 묘한 기후 조화를 느낀다.

기후는 일정한 지역의 여러 해에 걸쳐 나타나는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의 평균 상태를 말하는데 일 년의 24절기(節氣)72()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5일을 1(), 3후인 15일을 1()라 하여 이것이 기후를 나타내는 바탕이라고 한다. 1년을 12절기와 12중기로 나누어 보통 24절기라고 하는데, 절기는 한 달 중 월초(月初)인 매월 4~8일 사이에 오고, 중기(中氣)는 월중(月中)19~23일 사이에 온다.

천문학적으로는 태양의 황경이 인 날을 춘분으로 하여 15° 간격으로 24절기를 나누어 90°인 날이 하지, 180°인 날이 추분, 270°인 날을 동지로 부른다. 4계절을 봄은 춘분부터 하지까지, 여름은 하지부터 추분까지, 겨울은 추분부터 동지까지로 나눈다.

절기 해당 날짜가 경도(經度)에 따라 변하므로 양력은 매년 같지만, 음력은 조금씩 달라지고, 음력의 날짜가 계절과 차이가 많이 날 때는 윤달을 넣어 계절에 맞게 조정하였다. 24절기는 중국의 계절현상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기후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24절기는 관습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확인하는데 널리 쓰였다. 농경행사의 기준이 되어, 양력 420일 경인 곡우(穀雨) 무렵이면 비가 잘 내린다 하여 볍씨를 담가 못자리를 만드는 적기로 삼았다.

24절기 중 입춘(立春)은 양력 24일경이며 음력으로는 새해의 첫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입춘 무렵이면 가을에 심은 보리가 뿌리를 내리는데 입춘에 보리 뿌리를 뽑아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기도 했다. 보리 뿌리털 가닥이 많으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다. 오곡의 씨앗을 솥에 볶아 가장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온 곡식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입춘날 가정에서는 콩을 문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집안에 좋은 글귀를 담은 입춘 축()을 써 붙였다. 집안 방문 위의 벽, 대청마루의 기둥, 대문·부엌·곳간·외양간의 문짝에 입춘 축을 써 붙이는데 붙이는 곳에 따라 글귀의 내용을 달리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과 같은 글귀가 두루 쓰였고 마름모꼴 종이에 ()’ ()’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다. 대궐에서는 입춘이 되면 글재주가 훌륭한 신하가 임금에게 지어올린 연상시(延祥詩·신년 축사)를 뽑아 연잎과 연꽃무늬를 그린 종이에 써서 내전 기둥과 난관에 붙이기도 하였다. 입춘은 새해에 드는 첫 절기이기 때문에 지방마다 다양한 의례가 행해지던 풍습이 있다. 토우나 목우를 만들어 겨울의 추운 기운을 내보내기도 하고 굿 놀이를 하여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입춘절식이라 하여 궁중에서는 오신반(五辛盤·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수라상에 올렸고, 민가에서는 눈 속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쳐서 먹는 풍속이 있었다. 세생채(細生菜)라 하여 파·겨자·당귀의 어린 싹을 겨자에 무쳐 이웃끼리 나눠 먹는 풍속은 추운 겨울 동안 먹지 못하던 신선한 채소를 맛보고 결핍된 비타민을 보충하던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제 새봄을 알리는 입춘을 맞아 겨울 동안 움츠렸던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한 해를 활기차게 시작할 때이다. 복을 기원하는 글귀를 집안에 써 붙이지 않더라도, 올 한 해 소망하는 일과 살아가며 지켜야 할 약속을 마음 속에 새겨두고 싶다. 설을 쇠고 나면 추운 기운을 빨리 몰아내고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온가족과 이웃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 봄비는 쌀 비라고 했는데, 며칠 전 내린 쌀 비로 금년 농사가 대풍을 이루어 우리 모두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땅을 쓸면 황금이 쏟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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