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은 순 문학평론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신문사 기자로 일할 때 친하게 지내던 외교관 한 분이 서울에 살고 있는데 화가이며 왕성하게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 안부가 궁금해지면 전화로 근황을 묻기도 하고 시간이 되면 만나 한담을 나누기도 한다.

밴쿠버에서 대학 연구원으로 있을 때 소속된 한국학연구소를 통해 시인 고은 선생을 초청한 일이 있다. 당시 고은 선생의 시를 번역해 번역 문학상을 탄 교수가 내 친구였는데 그를 통해 고은 선생을 초청하게 된 것이다. 일 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고은 선생께서 밴쿠버에 오셨는데 밴쿠버 영사관에서 시인을 식사 대접하는 자리에서 문화담당인 그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유연하고 사려 깊은 그의 태도에 놀랐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문학이나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예사롭지 않은 경력의 화가였다.

그런 인연을 계기로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소개 받아 취재를 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문화행사에 초청받기도 했다. 수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호텔리어라는 TV드라마 주제가인 사랑은 단지 꿈”(Love is just dream)을 작곡한 클로드 최를 소개 받은 것도 북한 영아돕기 단체인 퍼스트 스텝스(First steps)”의 설립자인 수잔 리치(한국명 이수정)를 만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클로드 최는 캐나다 캘거리에서 활동하는 국제적인 음악가였는데 그를 만나 취재하면서 그와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캘거리와 밴쿠버의 거리가 비행기를 이용해야 할 정도의 먼 거리라 그를 취재한 장소가 밴쿠버 국제공항이어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후 클로드 최는 자신의 활약상을 내게 수시로 알려와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자신이 새로 작곡한 곡이 담긴 CD를 보내오기도 했다. 성악가 조수미가 불러 잘 알려져 있기도 한 그 곡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을 때면 당시 캐나다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북한 영아돕기 단체의 설립자인 수잔 리치는 밴쿠버의 천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한국어에 유창한 그녀는 한국에서 국빈들이 캐나다에 오면 통역을 도맡아 했는데 한번은 일 때문에 북한엘 갔다가 그곳의 영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북한영아들을 돕기로 결심을 했다. 당시 자신도 어린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단체를 설립하고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내가 그녀를 취재한 기사가 크게 신문에 실리자 미국에 있는 한국 신문사에서 내 글을 퍼갔고 그 일을 계기로 많은 성금이 답지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어느 교포 할머니께서 내게 전화를 해 그 단체를 돕기 위한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을 한 적도 있다. 현재 그 단체는 상당히 큰 규모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신문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밴쿠버에서 일 년 넘게 문화예술인들을 취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 냈는데 그 책을 마침 서울의 유명한 사립대 부총장님께서 읽어 보시곤 밴쿠버를 방문한 참에 나를 찾아 오셨다. 그때 그 분은 내게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서울에 오면 꼭 찾아오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분께서는 내 책을 자신의 전공분야인 민초신학 강좌의 교재로 사용했다며 다음에 책이 나오면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후 밴쿠버에서 두 권 더 출간된 책들도 그 분께 전달되었다.

좋은 외교관 친구를 알게 되어 밴쿠버에서 내 삶은 훨씬 풍요로울 수 있었고 취재원이 궁하면 그를 통해 이런저런 사람들을 소개를 받았다. 한 번은 그의 밴쿠버에서의 첫 전시회에 갔는데 작품이 하도 따뜻하고 부드러워 작품은 곧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그림들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는데 그는 수익금을 모두 북한 영아돕기 단체에 기부했다. 외교관직에서 은퇴를 한 그는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젊은 외교관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으며 국제교류를 하는 단체의 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외교관으로 일하며 철저히 약자들의 편이었고 딱딱한 법체계보다 인간의 상식, 합리적인 판단을 토대로 일을 했다. 다른 외교관 같으면 거절당할 일이 그를 통하면 해결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의로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는 내가 만난 최고의 휴매니스트이며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를 친구로 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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