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종교적 문제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학의 기반이 500년 이상 지속되어 유교라는 종교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종교란 내세와 신이 존재해야 하는데, 유학에는 사후세계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하다. 공자는 삶도 모르면서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하면서 사후세계와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공자를 성인으로 모시면서, 혹은 조상신을 모시면서 종교화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유학이라는 표현보다는 유교라는 종교적 표현을 많이 한다. 필자는 주로 학문적 입장에서 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종교에 비교적 관대한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편향에 따른 실수가 빈번하다. 오늘은 실수담과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 보려고 한다. 다문화와 관련된 일을 오래 하나 보니 필자의 집에는 외국인이 자주 드나들고 같이 숙식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필리핀, 터키,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등등 생각해 보면 실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같은 동양권은 편하게 쉬었다 가기도 하지만 터키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친구(?)들은 서로 황당한 경험을 한 적도 많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서로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다. 쉬운 예로 인도네시아에서 온 피트리아와 나의 딸과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메카를 향해 하얀 히잡을 두르고 절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깬 딸은 갑자기 내 방으로 달려와 집안에 귀신이 나타났다고 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뒤집어 쓴 귀신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 글을 쓰지만 당시 딸아이의 얼굴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몰라서 죄를 지은 경우도 많다. 왼손으로 물건을 전해준다든가, 쇠고기를 구우면서 돼지 목살을 함께 요리하여 하나도 못 먹게 만들기도 했고, 라마단이 끝나고 지쳐 있는 여성에게 라마단이 끝나는 날 축하파티 해 준다고 탕수육을 사 주었다. 난 당연히 탕수육은 쇠고기로 만든 것인 줄 알았다. 계산하면서 조용히 물어 보았더니 돼지고기로 만든 것이란다. 지금도 그 친구는 탕수육을 쇠고기로 만든 것인 줄 알았으면 좋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이 자리를 빌어 피트리아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일본인 여성이 많이 들어 온 이유 중 하나가 통일교로 인한 국제 결혼이다. 국적은 일본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한국인이다. 제사에 관해 상당히 관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로 인해 한국에 적응도 잘 하고 있었다. 이런 다양한 종교적 양상은 몽골의 샤만, 캄보디아 불교적 입장, 우즈베키스탄이나 터키 특유의 이슬람 문화 등 다양한 갈등의 양상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종교적으로 너그럽다. 초기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 성경을 제작하여 같은 성경으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우리 입장에서는 쉬운 일인데 외국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교나 다른 종교도 서로 상생하며 발전해 왔다. 산사에 가 보면 칠성각이나 산신당을 세워 부처님과 산신령을 함께 모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들어 종교적인 면에서 갈등이 심한 모습을 보인다. 슬픈 현실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럽다. 필자도 기독교인인데 다원주의적 모습을 보인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삶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요즘 대통령과 관련하여 소통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많이 듣고 공감하고 개선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만이 옳다고 우기는 것은 자만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변화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를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다. 나만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고 조금씩 이해하면서 함께 잘 살아보자고 하는 말이다. 피트리아가 서쪽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메카를 향해 기도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이해했으면 되는데, 그것을 몰랐고 그녀 또한 새벽에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안 하고 혼자 조용히 일어나 기도하면 되겠지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화의 결핍은 결국 불통이 되고,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서로 이해하고 함께 느끼면 변화할 수 있다.

<중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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