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내가 집에서 입는 평상복 대부분은 이십 년 이상 된 옷들이다.

 외출에서 돌아와 집에서 편안하게 입는 평상복은 동절기와 하절기 옷, 두 종류로 나눠 입는데 특히 하절기에 입는 옷은 내가 새 색시 시절 입던 것들이니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간다. 생각해 보니 참 유구한 세월이다. 동절기에 입는 옷들도 이십 년이 훨씬 더 된 것으로 편해 보이고 값이 싸 노점상에게 산 것이다. 외출복은 아무래도 남의 이목이나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유행이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새로 사 입게 되지만 집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입는 평상복은 편안함을 주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 입었을 것이다. 

  시어머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새 옷이 생기시면 모두 헐렁하게 고쳐 입으시는 걸 보고 의아해 한 적이 있다. 그뿐 아니라 선물 받은 새 내복을 그득하게 두시고도 다 낡은 내복을 입으시며 헌옷이 편하다고 하시곤 했다. 지금도 헌 내복을 입고 계시는 어머님이 눈에 선할 정도다. 유난히 몸에 끼는 옷을 못 견디시는 시어머님은 모든 새 옷을 불편해 하셨다.

 그런 어머님을 보고 살아온 탓인지 나 또한 남루해진 헌 내복을 즐겨 입는다. 하절기건 동절기건 잠옷 대용으로 내복을 입곤 하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어느 땐 구멍이 숭숭 난 내복을 입은 적이 있는데 털털한 남편조차도 너무 낡은 것이 아니냐며 넌지시 다른 옷을 입도록 권한 적도 있다.

 얼마 전에는 친정 엄마가 집에서 병원으로 거처(?)를 옮기시며 옷 정리를 하시다 내게 주려고 둔 옷이라며 건넨 적이 있다. 당신이 입던 옷인데 아직 멀쩡하니 입으려면 입으라는 것이다. 처음엔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내가 꺼리는 눈치를 보이면 섭섭해 하실까봐 얼른 옷을 받아 들며 입겠노라고 했다. 그 옷가지들은 모두 집에서 입는 헐렁한 바지들이었고 엄마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옷이었다.

 옷을 받아가지고 오며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내가 그 옷을 흔쾌히 받아들고 오는 것을 보고 좋아하셨는데 세월이 흘러 자신은 늙고 병들었지만 여전히 내 딸들은 나를 사랑하며 내 헌옷조차도 흔쾌히 받아 입는다는 생각에 흐뭇해 하셨던 것 같다. 외로운 노년에 자식의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하며 다소라도 행복해 하셨던 것 같다.

 지난 봄, 캐나다에 살고 있는 결혼한 큰 아들 내외가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일본인인 며느리에게 큰 애 어렸을 적 사진을 보여주고 큰애가 입었던 배냇 저고리며 큰애 돌상에 놓았던 명주실 등을 보여주며 큰애 어렸을 적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꼼꼼하고 속이 깊은 며느리는 그 물건들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내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애가 어려서 쓰던 작은 담요를 현재 다리미보로 쓰고 있는 나는 이 담요로 큰애와 작은 애를 모두 키웠다는 얘기를 해주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어느 새 세월이 흘러 중년의 고개를 넘고 보니 매사 편한 것이 좋다. 내가 오랜 세월 입어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어쩐지 깊은 안도감을 주는 평상복처럼 편안하고 부담 없는 사람이 좋다. 오랜 세월 나와 함께 해 낡고 볼품 없지만 한결같이 바깥 생활에서 지친 나를 편안하게 감싸주는 일상복처럼 나를 푸근하게 해 주는 그런 사람이 좋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불편함을 주는 사람은 피하게 되고 다른 외출복이나 신발도 편한 것들이 좋다. 어쩌다 불편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 가거나 몸에 꼭 맞는 정장을 하는 경우에는 얼른 볼일을 마치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여행도 불편함과 피곤함을 감수하는 여행은 피하게 되고 편하고 소박한 여행을 선호하게 된다. 본디 사람들 북적이는 소란스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점점 소란스런 장소나 만남은 피하게 된다.

 앞으로 내가 사는 동안 내가 그동안 입어온 평상복들은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변함없는 나무처럼 오랜 세월 나를 지켜준 낡고 볼품없는 옷들이 새삼 귀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아울러 오랜 세월 나를 편안하게 지켜준 옷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칠고 팍팍한 기운 완연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여유와 중후한 연륜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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