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 소설가)

 집집이 승용차들이 마당에 서 있다. 하나같이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시골집에 온다고 모두가 세차를 한 모양이다. 그 앞 옆 가장자리에 흙칠갑을 하고 서 있는 농사용 1톤 트럭이며 오토바이 들이 초라하다. 오늘은 나가 사는 자식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다. 처서가 지난 일요일이다. 이날을 모임날짜로 잡게 된 까닭이 있다. 이 모임의 발기는 벌써 반년도 전인  올 설에 있었다. 설 명절을 쇠기 위해서 고향집을 찾아든 집집의 자식들이, 즈이들끼리는 고향 유년 시절의 죽마고우들이라 마을회관에 모여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근서가 말을 꺼냈다.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위해서 무슨 뜻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모두들 찬성했다. 여름에 정기적으로 한 번씩 만나되 10만 원씩 갹출해서 이장에게 주어 동네 부모님들을 위해 쓰라고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하면 30여 호 동네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30여명이 좀 넘지만 그래도 매년 이렇게 만나는 우리들 열 일고여덟이 모으면 한 백칠팔십만 원은 될 터이니 다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그 첫 실행의 모임이 오늘인 것이다. 그런데 원래 정했던 모임은 중복이 낀 일요일이었다. 한데 그게 차질이 생겼다. 이때는 여름휴가의 황금기라 많은 친구들이 가족 피서나들이를 가야겠다는 거였다. 해서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일요일을 잡다보니 마침내 처서가 지난 오늘의 일요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근서의 아버지 허 서방의 마음이 착잡하다. 남의 자식들은 벌써 금요일 밤 아니면 토요일인 어제 다  왔는데 근서만 아직까지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오늘 오지 않을지 모른다. 직장인 회사가 부도가 나서 사장이 자살한 마당에 퇴직금도 없이 실직을 당해 차도 팔고 전셋집도 내려앉았다지 않는가. 그래도 며느리는 아범이 백방으로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는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동네에선 까맣게 모른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동네방네 떠벌릴 수도 없고 내 체면은 둘째 치고 젤로 자식의 얼굴이 깎일 것 같아 누구에게도 아무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이 문제다. 오늘 일을 제일 먼저 발기한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다. 모임시간이 가까워지자 허 서방은 장고 끝에 돈 10만원을 접어 손에 쥐고 마을회관을 향해 나섰다. “아니, 어르신 아니십니까, 근서는요?” “조금 전에 막 나한테 전화가 왔어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몰러 10만원만 얼른 나한테 대신 내달라라는겨 자, 여기 있어.” 그리곤 얼른 나와 버렸다.

  회관 안에서는 근서를 대신해 영남이가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근서 돈까지 받아 든 영남이가, “자, 근서 돈까지 백칠십만 원이야 예정금액이 다 들어왔는데 이걸 어떡할까 노인회장님께 드릴까?” “아녀, 아녀, 이장한테 맡기기로 했잖어 부모님들을 위해서 쓰라고.” “그려 참, 내가 근서 대신 회의를 진행하다 보니께 어리둥절하네.” 그래서 이장을 불러 들였다. 이장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또래친구다. “어이 이장, 이거 받아 백칠십만 원일세 이백만원도 안 되는 돈이지만 우리들 성의니까 부모님들 위해 요긴하게 써줘.” 그러자 이장이 펄쩍 뛰었다. “아녀, 아녀, 그걸 왜 내가 받어 당연히 노인회장님 드려야지 어디꺼정이나 노인들을 위한 성금이잖여 노인들이 마음대로 쓰시도록 해야지.” 그래서 또 이장이 노인회장님을 모시고 왔다. “어이구 이거,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게 됐는가 신문 라디오 텔레비에 나올 일일세. 그런데 이장, 이 돈은 그래두 동네 돈과 마찬가지니 이장이 관리를 햐. 동네 곳곳 손 볼일도 있을 거고 회관 수리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디.” “그런 건 이 돈과는 상관 없어유. 아무 걱정 마시구 어디 관광여행이라도 한번 푸짐하게 다녀오시도룩 하셔유 우리 청년회와 부녀회에서 주선은 하라구 할게유.” 그러자 이번엔 노인회장이 펄쩍 뛴다. “뭣여 여행, 이게 무슨 소리여 이 금쪽같은 우리 자식들 돈 가지구 우리 늙은이들이 놀러나 다니란 말여!” 그러자 모여 있는 자식들도 나선다. “어르신 이장 말대로 놀러두 다니시구 잡숫고 싶은 거도 잡수셔유.” “안 돼, 이장이 맡아야 혀!” 이렇게 실랑이를 하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근서다. “아니, 근서야 어떻게 된겨?” “미안해, 미안해 직장을 오늘 갑자기 옮기게 돼서 그랬어. 자, 내 것 십만 원.” “야, 벌써 니 아버님이 대신 내셨어. 그나저나 걱정하시더라. 얼른 집부터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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