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침례신학대학 교수)

 시절들

 아이 이름을 전화기에 ‘세상에서 젤 겨운 생물체’라고 입력해 둔 지가 얼마였더라. 이름 대신 ‘헤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생물체!’라고도 부른지도 삼사년은 넘었겠다. 글자 수 맞추러 줄여 입력하던 기억이 아슴한데 아이는 폭풍 사춘기를 통과해내는 중이다. 폭풍, 바람 세력 안에 든 모든 것들 휘말아 올려 재배치하듯 아이 내부가 혼돈의 와중인지, 건너오는 말들이 제법 예리하다. 날카롭게 던져놓고 저도 당황하고 나도 낯선 상황들이 아직 종료되지 않는 중. 아이는 자주 세상에서 제일 낯선 생물체로 변신한다. 변신, 변화, 발견, 발전......
 덕택에 사는 기쁨들을 헤아려 보기 시작하는지. 사람 일이 신묘막측하니, 걱정 말라는 것, 사람 사는 여러 모습들을 맘속으로 만지작 거려보다 건네는 말이다. 사람 영역 넘는 일에서야 고심해도 답 얻는 일이 난망하고 얻는대도 이뤄 낼 재간이 없으니. 사는 짐을 가볍게 해서 힘을 내 살아가야 하는 일이 이 무렵 얻은 답이니 신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현실의 무게에 휘둘려서 지지 말고, 배수진 치지 말고, 평온하게 살라는 신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다. 신은 우리를 사랑해낼 의지와 도울 능력을 겸비한 존재이시니. 사람은 염려하고 신은 해결하시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데, 그래야 할 것 같은, 그렇게 되고 마는 어리석음. 
 시인 김남조는 사람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은 그의 신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랬을까. 평안과 생명의 선물 보따리를 풀도록 하는 그 일. 인생의 시절들을 통과해내는 문제에 대해, 살아가는 일의 신비에 대해, 일상의 탑탑함에 대해, 목숨의 느꺼움에 대해 이럭저럭 도타워지는 시절. 
 
시간처럼 강물처럼 

 오래된 만두전골집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두고 갈 수 없어 이사도 멀리 못하게 만드는 공주의 아름다운 금강이야기는 뒤로하고. 개화기 어느 무렵 지었음직한 직조공장 건물을 사용하는 그 집. 뜨겁고 큼직한 왕만두를 접시에 처억하니 건져내 머리가 어지럽도록 후후 불며 뜨끈한 국물과 먹는 그 로망에 대해. 유물같은 연못 분수가 가느란 물줄기를 올리고, 원래는막힌 벽이었을 곳을 몇 군데 비정형으로 뚫어 낸 창으로 가꾼듯 만듯한 마당가 나무들을 내다보며 우리밀 만두를 먹는 일상이 무연하게도 추억같은 집. 공주 우체국 앞 조그만 다리를 건너 제민천변을 걷다 당도하는. 그리운 기억같은, 오래된 영화의 낡은 필름 속 모퉁이 같이 아련한 그 집.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넉넉히 한 그릇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이국적으로 눈빛이 아름다운 여주인의 옆모습을 안보는 듯 보러가자고, 공주는 유독 햇살이 마알간 고개들이 몇 있다고, 할아버지 두루마기 같은 보오얀 햇살 속 골목들은 또 할머니 치맛자락 같기도 하다고. 그것들을 핑계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초대라면. 우리도 한나절 그 안의 풍경이 되어 시간들을 충만히 채우자면. 선명한 빛깔 스카프라도 교복처럼 꼭 같이 골라 옷자락 위에 펄럭이며 이 골목, 저 거리, 그 강변을 쑤왈거리면 좋겠다고. 조금 멋쩍고, 많이 반갑게, 가을 햇살에 눈부셔 하면서  걷고, 웃고, 꿈꾸다 나른해 지면 좋겠다고. 저녁이면 하나 둘 씩 집으로 불려 가던 어릴 때처럼 해가 어둑해지면 다시 또 만나 놀게 될 것을 저절로 생각하면서 집으로 순하게 돌아가는 것도 좋겠다고. 마치 오래전 우리가 받던 초대장에 박히던 문구처럼 ‘국화향 가득한 계절에 초대합니다.’ 식으로. 그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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