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진다”는 지난 22일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에 국민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1억 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큰 책임이야 고객정보를 보호하지 못한 해당 금융사에 있겠지만 이들을 관리감독하는 금융당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먼저 나서서 책임을 추궁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국민들을 어리석은 존재로 몰아버린 것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번 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부총리의 인식이다. 이날 부총리는 “금융 소비자도 정보제공 단계에서부터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다 정보제공에 동의해줬지 않았느냐”는 말까지 했다. 스스로 개인정보를 제공해놓고 왜 이제 와서 따지냐는 것이다. 정보제공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중 어느 누구도 개인정보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외부로 유출해도 괜찮다는 동의를 한 적은 없다.

  파문이 확산되고 국민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다음날 아침 회의석상에서 현 부총리는 해명성 발언을 했다. 전날 자신의 발언은 “현재 금융소비자의 96%가 정보제공 동의서를 잘 파악하지 않는 등 정보제공 동의와 관련된 관행을 지적한 것으로, 금융소비자도 앞으로 거래 시에 좀 더 신중하자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란다. 현실을 모르는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금융거래를 하거나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려면 의무적으로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인쇄된 금융사 약관은 읽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읽었다 해도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경제수장이 이런 현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을 부총리 개인의 실언으로 빚어진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단 이번과 같은 개인정보 유출 말고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편익이 증대될수록 그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사회적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예측하기도 어렵고 누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두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국민들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정부당국이나 공직자들의 생각이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위험에 대한 인식과 점점 괴리되는 것이 문제이다. 이번 카드 사태도 그렇다. 민감한 개인정보가 언제 어떻게 유출됐는지 알 수 없고 이로 인해 누가 어떤 피해를 당하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많은 국민들이 염려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된 금융사에서는 사장과 임원들이 사표를 제출하고 수습책을 마련하고 있는 마당에 정부당국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2차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피해자들이 알아서 카드를 해지하거나 재발급 받는 등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온종일 북새통을 떨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부총리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부총리는 24일 오전 한 조찬 강연에서 “진의가 어떻든 대상이 되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해명이 아니라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사과나 해명으로 국민들의 돌아선 마음을 달래기는 이미 늦은 듯하다. 부총리 스스로 말했듯이 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의 책임이 훨씬 크다. 또 다시 기회를 잃기 전에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는 행동을 보여야 할 때다.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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