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본사 상임이사)

영화 <노예 12년>이 8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의 상인 작품상을 받았다. 이미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터에 작품상과 각색상 조연상 등 3관왕을 받아 화제에 올랐다.

<노예12년>은 자신의 비극적 체험을 옮긴 ‘솔로몬 노섭’의 실화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840년대, 미국에서는 노예 수입이 금지된다. 그러자 흑인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만연한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주와 찬성하는 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으며 납치된 흑인들은 노예제를 시행하는 곳에서 비싼 값에 팔렸다.

주인공 ‘솔로몬 노섭’은 뉴욕에서 태어난 음악가로 아내,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높은 보수를 주겠다는 사기꾼들에게 속아 워싱턴에 가게 되고 그곳서 인신매매꾼들에게 납치된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의 한 농장으로 팔려가 '플랫'이란 노예로 12년 동안 악몽같은 생활을 한다.

솔로몬 노섭 역을 맡은 배우는 절제되고 차분한 연기로 비극적 상황에 놓인 솔로몬 노섭의 심리를 재연했다. 서늘한 눈빛. 차별에 대한 고통, 자유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

그의 눈빛에서 20년 전 보았던 서아프리카 노예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94년 여름, 나는 창간 3주년 기념 특집을 엮고자 사진기자와 함께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의 고향을 찾아 떠났었다. 그러나 세네갈을 거쳐 뿌리의 고향인 감비아로 들어가고자 비자를 받는 중에 감비아에서 내전이 일어나 할 수없이 서아프리카의 이웃의 나라들로 발길을 돌렸다.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코트디봐르와 가나는 미국으로 팔려가는 흑인들을 잡는 사냥터였다.

대서양만 건너면 아메리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유럽의 노예사냥꾼들은 이곳에서 흑인들을 붙잡아 며칠씩 노예성에 가둬두었다가 배로 실어 날랐다. 바닷가에 지어진 노예성의 구조는 한번 들어가면 철문이 열리지 않았고, 오직 바다로 향한 문을 통해 배에 직접 오르게 되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당시 노예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노예선에 오른 아프리카인은 약 500∼600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살아서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한 노예는 150만 여 명에 불과했다. 4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성에서 또는 노예선에서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사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땅을 밟은 이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미국 흑인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들이다.

영화 <노예 12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수난을 담담하게 재연한다. 자신 역시 아프리카계 흑인인 감독 스티브 맥퀸은 영화적 기교를 최대한 배제하고 잔혹할 정도로 차분하고 단조롭게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타인의 고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면서 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염전 노예’문제가 시끄럽다.

그들의 비참한 삶이 알려진 것은 섬에 갇혀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던 한 지적 장애인이 세상 밖으로 띄운 한통의 편지 덕이었다.
30만 원에 팔려온 채모 씨와 100만 원에 팔려온 김모 씨. 그들은 "도망치면 칼침을 놓겠다"는 염전 주인의 협박이 무서워 5년2개월과 1년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섬에서 갇혀 살았다. 다행히 글을 쓸 줄 아는 김 씨가 어렵게 구한 종이와 펜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감시의 눈을 피해 어두운 눈으로 밤마다 조금씩 글을 써나가 1년 만에 "이 편지를 보는 즉시 찾아와 주세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읍내 우체통에 넣었고 이것이 알려져 마침내 세상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값싼 노동력을 위해 직업소개를 통해 인력을 사오거나 지적 장애인들을 꼬드겨 섬으로 데리고 와 마치 노예처럼 일을 시킨 행위가 저 미국에서 벌어진 <노예 12년>과 무엇이 다르랴.

자유란 인권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염전 노예 문제가 사실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인권점수는 몇 점일까. 우리는 과연 자유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노예12년> 영화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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