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며칠을 감기 몸살로 앓다가 초파일을 맞아 심기일전하려는 마음에서 이따금씩 들르는 청안 부근, 기원사라는 절을 찾았다. 절도 인연이 있는 것인지 십여 년 전  내가 캐나다에 살 때 잠시 한국에 들러 어머님 천도제를 지낼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지인이 이 절을 소개해 줘 알게 되었다.

 시어른들의 유택이 있는 선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원사는 작고 아담한 사찰인데 어린애처럼 천진한 스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무욕한 스님의 성품은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뒤로 마음이 무거울 때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절을 찾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스스럼 없이 대해주는 스님이 마치 오래 전부터 가까이 알고 지내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언제고 어려울 때마다 찾을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가 생긴 느낌이었다. 

  차창 밖의 풍경을 보니 눈이 부시게 푸르른 오월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어딜 보아도 상큼한 초록의 물결은 보는 이의 마음을 마냥 설레게 했고 하얗게 무리 지어 핀 조팝나무의 행렬은 어쩐지 천상의 꽃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도 바람에 날리는 듯 했다.

 절에 당도하고 보니 초파일 의식은 이미 끝나고 신도들이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거닐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잠시 가부좌를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법당 안은 조용했고 이따금씩 조용히 들어와 절을 하는 신도들만 눈이 띄었다. 언제고 느끼는 바이지만 법당 안에 들어와 합장을 하노라면 마음이 하염없이 편안해지며 세상사 시름을 모두 잊게 된다. 게다가 오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일이 아니던가.

 법당에서 나와 산신각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언젠가 이절에서 어머님 천도제를 올릴 때도 법당안으로 나비 한마리가 날아든 일이 있다. 스님과 음식을 차리는데 나비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간 어머님의 현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허리가 불편해 외출이 자유롭지 않으셨던 어머님께서는 죽으면 새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사실 여부를 떠나 천도제 당시 나비를 어머님이라고 믿고 싶었고 오늘 만난 나비 또한 어머님처럼 느껴졌다. 

 산신각 앞에는 남학생 한 명이 간절하게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었다. 무슨 간절한 염원이 그에게 있는 것일까. 그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나 또한 빌었다. 사찰이란 모름지기 인격도야와 정신수양을 위한 도량이어야 한다는 산신각에 새겨진 소박한 글귀가 새삼 떠올랐다.

 법당 앞마당에는 화사한 연등이 수 많은 중생들의 염원을 담은 채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어느 처사 한분은 연등행렬 아래 앉아 무언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한 옆 텐트 아래서는 할머니 한 분이 손주 손녀들과 연등을 만드느라 열심이었다. 이미 연등을 만든 사람들은 연등을 들고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법당 아래 행사장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을 담아 살풀이 춤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춤꾼에게 다가가 물으니 공주에서 온 보살로 스님과 인연이 있어 오게 되었다고 했다. 작년에도 본 적이 있는 세종시 부근 부강에서 다례원을 하고 있다는 보살은 올 초파일에도 신도들을 위해 차 공양을 하고 있었다. 연꽃차를 한잔 얻어 마시니 마음이 한결 맑아진 듯 했다.

 


 비빔밥으로 점심공양을 하고 몇몇 신도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부산, 천안,광주... 그들은 스님과의 인연을 잊지 못해 초파일이면 모인다고 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천안출신의 보살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점심공양을 주도하며 준비를 한 듯 했다.

 초파일은 자비와 사랑을 새삼 배우는 날이 아닌가 싶다. 남을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 아닌가 싶다.  소리 없이 흐르는 사랑의 강물만이 이 험한 세상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날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의 아픔과 상처가 빛나는 사랑의 힘으로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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