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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 용 영화감독
김 수 용 영화감독
  • 유영선
  • 승인 2010.11.01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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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나 감독이나 독서가 제일, 책 많이 읽는게 승리”
“81년 영화 ‘만추’청주 가로수 길에서 낙엽 날리며 촬영”
10년 배워야 비로소 영화감독… 청주대 제자 영화감독 10명
 

김수용 金洙容 감독은…

△1929. 9. 23 경기 안성 출생 △서울사범본과(현 서울교육대학)졸업 △1954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P.D (육군대위) △1958년 극영화 <공처가>로 데뷔 △1973 서울예술전문대학 강사 △1983 마닐라 국제영화제, 하와이 국제영화제 한국대표 △1984 이태리 페사로영화제 한국대표 △1984년 청주대 예술대 교수 △1989년 예술원회원 △1992 몬트리올세계영화제 심사위원 △1993 동경국제영화제 심사위원 △1999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2005 대한민국예술원 연극·영화·무용분과 회장 △수상 대종상 작품상 및 감독상 6번, 서울시 문화상(1965), 아시아영화제 감독상(1967), 청룡상 작품상·감독상 4번, 한국일보 연극영화예술상 3번 , 대한민국 예술원상(1990), 일본가톨릭 영화상(’97), 일본영화비평가상(1997), 은관문화 훈장(1999), 기독교문화예술 대상(1999), 한·일문화기금상(1999)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갯마을>(1966), <안개>(1967), <산불>(1967), 〈사격장의 아이들〉(1967), <야행>(1973), <화려한 외출>(1977), <도시로 간 처녀>(1981), <만추〉(1981), 〈피에로와 극단〉(1982), <중광의 허튼 소리>(1987), <사랑의 묵시록>(1995), <침향>(1999) 등 109편 감독. △저서 <예술가의 삶>, <영화를 뜨겁게 하는 것들>, <나의 사랑 시네마> 등

대학의 캠퍼스엔 가을이 내리고 있었다. 노감독의 어깨너머 유리창 밖으로도 낙엽이 지고 있었다. 그가 이 도시, 청주의 플라타너스 길에서 29년 전 김혜자 주연의 영화 ‘만추’를 촬영할 때도 낙엽은 이렇게 무시로 떨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었다. 낙엽에 대한 추억때문일까. 노감독은 즉석에서 시를 외었다.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윽박질린 달이여/-후략-” 2010년 미당 서정주 문학상으로 당선된 장석남교수의 시 ‘가을 저녁의 말’이다. 19행의 시를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는 멋쟁이 노감독에게 다른 시를 청했더니 눈을 감고 97년 정지용문학상상 수상작인 조오현 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를 왼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첫 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난 이 시가 너무 좋아요. 그 스님 앞에서 내가 외거든요. 그러면 스님은 보통이지, 내 시가 읽혀야지 뭔가를 주게 되지요. 다 봤다고 잘난 체 하고 거만하고 오만해서 적당히 늙어 죽으면 되겠냐는 것이지요.

한 자리에서 30편의 시는 거뜬히 욀 수 있다는 82세의 영화감독.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문예영화를 만든 한국영화의 거장 김수용金洙容이 10월22일 오후, 청주를 찾았다. 올해로 11회째 계속되고 있는 청풍명월영상제의 마지막 행사로 마련된 ‘김수용감독과의 만남’에 초청을 받아서였다.

그를 만난 것은 청풍명월영상제 조직위원장인 김경식 교수(청주대 영상학과)의 연구실에서였다. 서가에 꽂힌 영화필름들과 각종 사진들을 둘러보는 김 감독의 입가에 정겨운 미소가 어렸다.

-청주 오신 게 얼마만인가요.

“여기는 한 10년 만에 와요. 청주가 교통의 요지이니 오며가며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초청받아 오게 된 것은 오랜만이네요. 이 방 복도 건너가 바로 내 연구실이었어요.”

-오랫동안 몸담았던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게 돼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그렇지요. 95년 정년으로 떠났으니 마지막 강의를 한 게 15년 전이네요. 요즘 대학생들이 5~6세때쯤일테니 꽤 오래 되었지요. 81학번부터 청주대에 영화과가 생겼는데 창설되면서 왔어요. 오늘 나를 부른 김경식 교수는 83학번으로 초창기 학생이었지요. 청주대는 영화계에서 알아줘요. 충무로 가면 졸업생들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해요.”

-청주대에 영화과가 생기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서요.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총 관할을 했어요. 당시 정종택 충청북도지사가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영화제작을 제의해 제가 짬을 내서 영화를 찍었는데, 제목을 ‘무심천’이라 했어요. 처음 무심천을 봤을 때 인상이 깊었거든요. 충북대 학생들이 하기 방학을 어떻게 지내는가 이것을 찍는 것이었는데 청주대에서 항의가 왔어요. 역사깊은 사학이 있는데 어떻게 그쪽 학교만 하냐는 거지요. 밤을 새워 이틀간 시나리오를 다시 썼어요. 배역을 50대 50으로 했지요. 그런데 그 영화가 그 해 청와대서 콘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했어요. 정종택 지사는 청와대로 발령이 났지요. 그 후 10년쯤 되었을까 청주대 김준철 총장께서 영화과를 신설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왔어요. 연극의 차범석 선생과 제가 왔지요.”

-지역사회의 관심도 많았었지요?

“1981년 ‘만추’라는 영화를 찍었을 때 청주 진입로의 플라타너스를 배경으로 활용했지요. 김혜자 정동환이 마지막 걸어오는 장면을 찍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당시 우리과 학생들이 낙엽을 날렸지요. 그런 생각도 나네요.”

-오늘 만나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 건가요.

“서로 귀한 시간인데 횡설수설할까봐 원고를 만들어 왔어요. 젊을 때 시간 아껴 고민하고 공부해 나중에 좋은 예술가가 되라는 내용인데, 오늘 마침 1986년에 찍은 나의 영화를 본다고 하니까 그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좋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최근 장충동 댁을 헐어서 건축중이시라면서요. 개인 영화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기사를 보았는데요.

“영화박물관까지는 좀 과장된 표현이고요. 저는 50년대부터 지금의 집터에서 살았어요. 옛날엔 통행금지가 있었지요. 우리가 멀리서 촬영을 하면 통행금지시간 안에 집에 돌아오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장충동은 도심지에서 10분, 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서 109개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대부분 거기서 만들었지요. 그런데 우리 집 주위에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집이 함몰됐어요. 그래서 집을 헐고 새로 짓게 되었는데 ‘수용빌딩’이라는 이름으로 7층으로 정했지요. 공사는 올 2월부터 시작했고 12월 말 완공 예정예요. 청주 출신의 동원건설 사장 송재엽씨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심플하고 멋진, 예술가가 사는 집처럼 지어달라고 주문했어요. 건물의 용도는 영화박물관이라기보다는 영화연구소, 제가 만든 영화를 중심으로 해서 후학에게 자료 제공이라든가 영화에 관한 정보교류를 하는 장소로 만들려고 합니다. 박물관은 뭐, 이름 석자만으로는 안 되지요.”

-김 감독께서 그곳에 계신 것만으로도 박물관 아닌가요. 찾아가서 뵙고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아직도 현역처럼 활동하시잖아요.

“글쎄요. 아직 여기저기 갈 곳은 많네요. 지난 6월엔 동경에서 열렸던 경술국치 100년 영상영화 심포지엄에 제가 만든 영화를 가져갔어요. 일본과의 문제를 영화를 통해서 나눴지요. 또 오는 12월 1일 베이징 CNAA(북경 예술원) 초청으로 한국영화와 한국 사람들의 얘기를 강의하기 위해 원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 부산영화제만 해도 두 번이나 갔었지요. 10월 9일은 김지미 회고전에 초청받았고, 또 이번 15회 영화제를 끝으로 김동호 위원장이 그만두면서 그 세레머니에 참석하고자 가고.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부산을 갔었지요.”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영화제가 생겼지요. 어떤 영화제가 좋은 영화제인가요.

“우리나라에 현재 이름을 갖춘 영화제가 40개 정도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많은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는 200개 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영화제가 순수하게 영화와 관객과의 교류, 영화인들의 잔치로 가면 좋은데 우리처럼 이권이라든가 영화제 자체의 순수성이 엷어진 그런 행사는 몇 백 개가 있어도 영화에 도움이 안돼요. 제대로 상업화나 되면 차라리 괜찮은데 전시효과랄까, 지자체에서 홍보를 위해 어떻게 해 보려고 그러는 것, 이런 영화제는 좋은 영화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잘 크고 있는 영화제를 꼽는다면.

“제가 그런 말 하면 거기 안 낀 영화제 운영하는 사람들이 우린 뭐냐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고 하는 부산영화제를 말한다면 세계영화제라고는 하는데 무엇을 보고 세계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많은 사람이 오기는 하지요. 남이 가니까 가는 사람들, 거리는 꽉 찼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위해 얼마나 도움 줄 것인가 회의적예요. 그래도 영화를 보기위해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15년 동안 얻은 큰 수확이지요.”

-충무로영화제로 가슴 아픈 일이 있으셨지요.

“사실은 그런 영화제가 커야 하는데. 나는 충무로에서 50년간 영화작업을 해서 이 영화제야말로 영화인들의 축제로 잘 되길 기대하고 책임을 맡았었지요. 그러나 6.2 지방선거이후 단체장이 바뀌면서 지자체가 약속했던 예산이 삭감됐어요. 영화제라는 것이 예산 없이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최소한도로 줄여서 결국 7억원의 예산으로 마무리 짓고 끝냈지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로망이라는 시절이 있었지요. 그 영화가 TV에 밀려 사양길로 가는 듯 하다가 최근 다시 종합예술로 뜨고 있거든요. 영화계의 산 증인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모든 것에 징크스라는 게 있잖아요. 스포츠, 예술 다 그래요. 60년대 충무로가 화려할 때도 80%가 제작비를 날리고 빈손으로 돌아가요. 90년대 한국영화가 다시 도약했다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80%가 손을 든다고 하대요. 이 마의 벽을 어떻게 허무느냐는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현재 다시 대중들이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고 해도 내부를 파고 들어가면 제작사의 80%가 망하니까 얼마나 많은 영화인들이 좌절하겠어요. 10%가 반짝이는 거예요. 어떤 사업을 이렇게 따지겠습니까. 차이가 너무 커요. 그래도 잘 나가는 영화를 관객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불씨로 살려서 전망이 밝다고 보는 것이지요. 모든 예술이 동일하게 발전할 수는 없어요. 햇빛이 비치면 그늘이 꼭 있게 마련이니까요.”

-영화얘길 나누고 싶은데요. 109편 영화, 보통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한국문예영화의 거장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시는데 이쪽으로 천착을 하시게 된 계기나 철학이 있으시다면.

“109편을 분석해보니까 그 중 50편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더라고요. 절반 정도지요. 60년대 초, 그때는 영화는 덮어놓고 재미있어야 보러 왔지요. 작품성보다는 재미였어요. 한국영화의 작품성은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지요. 그런데 재미만 추구하다보니 자연히 표절시비도 일고 문제가 많았어요. 저는 표절을 않기 위해 우리 문학에서 원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소설은 무겁고 재미없고 인간관계가 복잡해서 제작자들이 기피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원작의 문학적 향기를 살리면서 재미있게 보게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요. 최초작 ‘갯마을’을 내놓았더니 흥행도 괜찮았고 평도 좋았어요. 박경리의 ‘토지’까지 50편을 그런 마음으로 제작했지요. 109번째는 구효서라는 젊은 소설가의 ‘나무남자의 아내’를 ‘침향’으로 바꿔 제작했지요. 물론 문학에서 찾았다고 수준이 꼭 높은 것은 아니에요. 영화는 완성도와 감동, 또 예술성이 있어야하지요. 이렇게 종합적으로 표현이 돼야 해요.”

-60년대에 영화제작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그때는 1년에 280개에서 320개의 영화가 만들어졌어요. 그 10년간 제가 50편을 만든거지요. 1년에 5편씩. 그러니까 영화 한편에 보통 2~3개월 정도 걸렸는데 그 정열이 어디서 나왔느냐. 역시 영화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예요. 영화는 처음부터 선택 돼 있어야 해요. 요즘 감독들은 현장에서 선택해요. 그러니까 필름이 많이 들고 시간이 배로 걸려요. 소신을 갖고 미리 잘 구상해서 찍어야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시험하듯 이렇게 저렇게 다 찍어 봐요. 당시는 모든게 어렵다보니 필름을 아낄 수 있는 감독이 주가가 높았지요.”

-작품마다 애정이 있겠지요. 스스로 작품을 평하신다면.

“애정은 감독이 갖는 게 아니고 관객들 몫이지요. 영화 한편 찍는 것은 아기를 분만하는 것만큼 힘들어요. 109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109번 아기를 낳은거나 같지요.”

-기억나는 배우를 꼽는다면.

“연대별로 다릅니다만, 남정임씨가 생각나네요. ‘트로이카’와 ‘유정’이라는 영화를 찍었지요. 그 후 20년 만에 최인훈 소설의 ‘웃음소리’를 찍고 세상을 떴어요. 3000명 중 춘향역으로 뽑혔던 홍세미씨도 생각나네요. 남정임 홍세미씨 예명은 내가 지어줬어요. 또 나하고 20편이나 작업을 한 이은정이라는 여배우. 이번 부산영화제서 만난 김지미씨도 기억이 납니다.”

-예술가는 태어나는 것인가요. 만들어지나요.

“일단 예술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지요. 예술가와 아닌 사람이 다른 게 있다면 역시 감수성이지요. 예술은 금방 안돼요. 끈질기게 인내할 수 있는 인내력, 자기 작품 만들 때까지. 구체적인 말로는 관찰력이 예민하고 기억력이 비상하고, 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런 것은 후천적으로도 가능해요. 예술가가 되는 길을 교과서처럼 말할 수는 없지요.”

-태어난다고 하지않나요.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을 지닌….

“여배우를 카메라 앞에 세우고 주문하면 감독이 주문하는 만큼만 하는 게 여배우예요. 그런데 더 잘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승호, 황정순씨 같은 배우, 그들은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봐야지요.”

-감독님은 타고났다는 생각하시는지요.

“영화는 타고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부하면 다 해요. 다만 저는 다른 사람보다 기억력이 조금 좋다고 생각해요. 시를 외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지요”

-시적 서정성이 바탕이 되었겠군요. 왜 문예영화에 관심을 두셨는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시에서 받는 고급 정서를 영화에서 쉽게 만들어서 영상으로 해결하는 것. 이런 게 다른 감독과 내 작업과의 차이일 것이에요.”

-요즘 영화 참 잘 만드는데 오락성이 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감인데 오락이 나쁠 것은 없어요. 다만 오락에도 서정성이 있으면 좋겠어요.”

- 최근 보신 영화는

“원빈의 아저씨. 재미있게 봤지만 씁쓸해요. 너무 잔인해서 찝찝해요.”

-젊은 감독의 영화도 모두 보시는지요.

“봐야지요. 그래야 쓴 소리도 해요. ‘워낭소리’, ‘똥파리’ 모두 봤어요.”

-후배나 제자 영화인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쓴 소리는, 영화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하려면 적극적으로 하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영화감독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에요. 청주대 졸업생 중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10명 정도가 돼요. 감독이 되기까지 10년이 걸리는데 대단한 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데뷔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길을 어느 선까지 가는가예요. 그리고 영화하려면 배우나 감독 모두 독서가 제일입니다. 책 많이 읽는 게 승리예요.”

-인문학적인 것을 버리고 실용적인 것만을 취하다보니 자양분이 부족한것 아닌가요. 예술과 경제는 어떤가요. 영화인들 중에는 어려운 분들도 많이 있지요?

“경제적 어려움은 영화 종사자만이 아니지요. 어느 시대나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있기 마련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융합 되냐가 과제인데 정치가들의, 경제인들의 몫이고, 우리는 고갈되고 삭막한 사람들 정서를 어떻게 적절히 채워주느냐로 고민해야지요. 한국은 항상 정치경제가 앞서고 그 그늘에서 문화예술이 신음하며 살아 왔는데 앞으로도 정치 경제가 문화예술을 누르면 그 나라는 전망이 없어요. 위정자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지요.”

-요즘 하루 일과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먹고 오후 7시정도부터 4시간쯤 자고 밤 11시에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5시간정도를 일기쓰고 책 읽고 정리를 해요. 그 다음에 아침 먹고 만보를 걷지요. 오늘은 차타고 와서 못 걸었어요.(김 감독은 허리에 찬 만보기를 보여주었다.) 예전엔 남산을 걸었는데 지금은 송파쪽, 탄천이라는 개울가를 걸어요. 오후에는 친구도 만나고 저녁에는 술도 마시고… 그런 되풀이지요.”

-매일 일기를 쓰시나요?

“40년 동안 쓰고 있습니다. 200자 원고지로 4장 정도를 깨알같이 정자로 쓰는데 이제는 분량이 꽤 되지요.”

-가족관계는.

“6.25때 결혼을 해 2남 1녀를 뒀어요. 물론 다 결혼하고 의사와 교수 사업가로 나름대로 자기일들을 하고 있어요.”

-더 좋은 말씀 들어야하는데 아쉽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대담 /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기록 / 오상우 ▶사진 / 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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