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길 (논설위원 / 소설가)

안수길 (논설위원 / 소설가)

 ‘냉소. 조소. ’웃음 소‘자가 들어가지만, 이건 웃음이 아니다. 비꼬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부정과 반대에는 그래도 설득이나 회유의 여지가 있다. 절충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비꼬고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냉소에는 대책이 없다. 부정과 분노를 넘어 호 불호 간에 관심   조차 꺼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냉소나 조소는 그래서 어렵고 무섭다. 사회나 정치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도를 넘은 불신과 분노가 냉소로 변해가고 있다. 아니 넓게 번져가고 있다.
 지난 4월 29일, 4개 지역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직전에 돌출한 성완종 리스트가 여당에 악재로 작용, 야당이 덕을 보리라던 초기의 예상을 뒤엎고, 여당인 새누리당이 3석을 얻는 의외의 대승을 거뒀다. 야당인 새정연의 파벌싸움에 유권자들이 실오라기 같던 기대마저 접고 관심을 끊은 탓이지 싶다. ‘늬들끼리 잘 해 봐라’ 냉소분위기로 돌아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존 시는 소속당 공천만 받으면 ‘따 놓은 당상’이던 호남(광주 서을)에서조차 야당이 참패, 가출 무소속후보에게 자리를 뺏겼다. 자파독식을 위해 배척과 견제의 칼을 휘두른 친노의 전횡에, 일부 비노중진당원이 이탈했는데도 반성은 없고 투쟁구호만 요란한 새정연 노선에 실망한 호남민심이 냉소를 보낸 탓이란다. 독식이 독(毒)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유권자들의 눈에 새누리당이 유독 예뻐 보여서 대승을 안긴 건 아닐 거다. 기권보다는 최악을 막고 차선이라도 택하는 게 도리라는 책임감이 작용한 까닭이리라. 새누리당에 보내는 유권자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인물이 모두 여당인사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집권 2년 간 국정의 모든 사안이 대통령의 수첩에서만 나오고, 여당의 역할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리스트 후유증 대처 역시 그렇다. 곤경에 처한 성완종 씨가 기댈 언덕을 찾다보니, ‘살아있는 권력’쪽에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이 거절당하자 홧김에(?) ‘거절한 손’을 적었을 뿐, 적힐 이름들은 숱하게 많았을 거라는 유권자들의 추측은 무리가 아니다. 회사가 두 차례의 워크아웃을 당하고, 성완종 본인이 두 차례의 사면을 받는, 그 사이에 추징금 감면과 수천억 원대의 무담보대출을 받았고, 180여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됐다. 불가사의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조성 된 비자금이 어디로 흘러갔을까를 추측하는데, 여야당 어느 쪽에도 면죄부가 주어질 이 없다. 쪽지에 적힌 이름 외에도 여야 정치인은 물론 관계와 금융계 인사들이 없을 이 없는 일. 신문 방송이 시도 때도 없이 흘려주는 뉴스조각들을 꿰어보면, 엮어지는 얘기가 추측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타킷 1호가 된 이완구 전 총리의 부정직한 대처와 버티기, 이를 방관하다시피 한 새누리당의 처사도 전 총리 개인뿐만 아니라 당전체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냉소를 받게 됐다.   돌출 된 성완종 리스트는, 한 기업인의 과다한 욕망이 좌충우돌 저지른 비리의 내막을 넘어, 정계와 기업계, 관계와 금융계가 청정구역 없이 뒤얽혀 쳐놓은 장막 뒤에서 얼마나 많은 부정이 숨겨지고, 얼마나 많은 혈세가 낭비되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이다.  
 성완종 씨 자살 소식이 보도되자, 정계 일각에서는 최초의 계획대로 자원개발 분야에 관한 수사로 끝낼 것을 공연히 비자금에까지 확대하여 일을 키웠다는 비판이 일었단다. 그게 피의자의 자살이 애석해서가 아니라, ‘나 떨고 있니?‘ 가슴 졸이던 사람들이, 도둑이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는 격으로, 번져 올 불길이 두려워 그랬던 건 아닌가? 어차피 검찰조사가 끝나면 전말은 밝혀지고 뒤탈도 멈추지 않을 터. 특검이다 뭐다 또 꼬리가 이어질 것이다.
 이래저래 국민들의 냉소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냉소가 깊어진다는 건 기대도 신뢰도 다 무너지고 불신과 분노를 넘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와 너는 노는 물이 다르니, 너나 잘 하세요.’ 갈라 선 부부보다 더 싸늘한 무관심이다.
 냉소주의자는 설득도 회유도 어렵다. 동참 협력은 더욱 어렵다. 관료나 정치가가 가장 두려워해야할 게 국민의 냉소다. 무슨 일을 해도 따르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씨알이 안 먹힌다. 냉소를 품고 돌아선 국민들 등 뒤에서 무슨 정치를 할 거며, 무슨 국사를 제대로 집행할 건가. ‘너나 잘 하세요.’ 냉소가 더 깊어지기 전에, 나라 꼴 되게 하려면 ‘노는 물이 다른’ 사람들이 구각(舊殼)을 벗어야 할 텐데, 이런 사태에 뻔한 결말을 내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도 광풍 지난 뒤 ‘도루묵’이 된다면 확산될 냉소주의를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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