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논설위원 / 소설가)

▲ 안 수 길(논설위원 / 소설가)

 경술국치(1910)이후, 일제강점기 36년의 고통은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2차대전 종식과 합께 맞은 광복(1945)도 우리의 자주역량만으로 쟁취한 게 아니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후 휘몰아친 6.25전쟁(1950)의 참화 역시 우리의 뜻이 아니었고,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휴전을 맞은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리 근세사 백년의 절반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치욕의 역사였고 고통의 연속이었다. 왜 그랬을까? 수긍하기 싫고 부끄러운 역사지만, 국론분열로 인한 내우(內憂)가 외환(外患)을 부른 탓이었다. 국론결집을 이루지 못하고 자강력(自强力)을 기르지 못한 게 그 원인이었다.

 대원군의 쇄국이 외세 면역결핍을 부르고, 궁중의 권력다툼과 국론분열이 국치의 빌미였다. 2차대전 승전국거두회담(미.영.중.소)이 결정한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민족지도자들의 의견불일치로 찬탁과 반탁으로 민족과 국토가 양분 돼, 남과 북에 이념이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됐다. 이념갈등과 여론분열이 분단이라는 새로운 고통을 자초한 것이다. 6.25는 강대국들의 이념대결로 인한 양극화시대에, 공산 맹주국들(중.소)의 사주와 지원을 업은 김일성의 불법남침이 벌인 민족의 참화(慘禍)였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3년여 간의 전쟁 끝에 총성은 멎었으나, 분단의 고통은 그대로 남았다. 분단 상태의 휴전이 우리의 뜻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통일달성이 역부족인, 자강력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아남느냐, 희망 없는 세월을 탄식하며 강압과 전화(戰禍), 그 참혹한 역사의 강을 헤엄쳐 건너는 동안, 그래도 우리는 질긴 인내로 절망을 극복했다. 비록 국토의 반쪽일망정, 전후의 지독한 가난을 견디며 맨땅에 박치기 식으로 몸부림 쳐 온 산업전사들 덕에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볼 만큼 산업화에 성공했다. 독재에 항거한 투사들 덕에 민주화도 달성했다. 과체중을 염려할 만큼 굶주림에서 해방됐고. 자유와 권리도 방만한 지경에 이르렀다. 치욕과 고통의 강을 건너 이만큼의 풍요와 자유를 누리게 된 건 우리의 의지고 역량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은 여기까지인가? 비만한 복부에 허리띠 느슨히 풀어 놓고, 방만한 자유를 만끽하며 편견과 아집과 이기(利己)에 매몰돼버린 ‘의식(意識)의 허기증’은 그냥 놔둔 채 격양가를 불러도 좋은 건가? 아니 국민 저마다 ‘나 홀로 독립찬가’를 불러도 좋은 건가?

 개발시대를 살아 온 산업전사들과 민권쟁취를 위해 투쟁한 민주투사들은 각기 다른 시각으로 이 시대의 가치를 추구하고, 정치를 재단하며 나라의 장래를 전망한다. 그 저변엔 오늘을 이루기까지 누가 더 큰 공로자인가를 가르려는 공명심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시점에서 누구의 공(功)이 더 큰 가를 논하는 건 무위한 일이다. 양편이 다 같이 이 사회를 떠받쳐 온 기둥이고,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그 생각이 모두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공의 대소를 논하고 서로를 비판하기 전에, 이기와 아집을 버리고 경청과 배려로 상호보완을 모색하는 화합의 길로 가야 한다. 그게 풍요와 민주를 제대로 누리는 선진의식이다.   지금 우리주변은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백 년 전과 흡사하다. 근세사 전반 50여 년을 고통으로 얼룩지게 한 국론분열도 되풀이 되는 양상이다. 진보와 보수, 여야와 당정, 당내계파  간 갈등이 첨예한데, 민심조차 지역과 성향에 따른 반목이 깊다. 이대로 가면 산업전사의 땀과 민주투사의 피로 적셨던 손수건을 다시 꺼내 통한의 눈물을 닦아야할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확립해야할 필수덕목은 선진시민의식이다. 산발한 머리칼처럼 헝클어진 민심, 분열된 국론을 결집시키자면, 정치인과 사회지도자와 공직자, 모든 국민이 이기와 아집을 버리고 역지사지로 상대를 배려하는 아량을 몸으로 익혀야한다. 책임과 의무, 자유와 권리를 법과 질서에 따라 청정수 흐르듯 투명하고 유연하게 행사하는 게 곧 선진시민의식이다.

 시급한 법안들이 잠자는 탓에 국정은 지지부진인데 의사당은 적막하다. 대통령은 화가 나셨는데 공직자들은 납작 엎드렸다. 거리는 피켓과 구호로 시끄럽고 국민은 불안하다.

 그런 우리에게 누군가가 ‘당신들의 역량은 여기까지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텐가? ‘그렇다’라면 우리는, 오로지 포식이 생의 목표인 살 찐 돼지와 뭐가 다른가? 살찐 돼지로 치욕의 전철을 다시 밟느냐,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 그건 우리 의지로 선택할 일이고 우리 역량으로 달성해야할 일이다. 지금은 그 가능성 여부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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