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농촌마을은 주민 72명에게 돈봉투…20만~1천만원씩

▲ 경찰이 조합장 후보측으로부터 건네받은 현금을 보관하던 A씨의 집을 압수수색 하던 중 발견한 5만원권 현금.

(동양일보) 올해 1월 충남의 한 농촌 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이곳에 돈봉투가 무더기로 살포된 이후였다.

'자수하면 최대한 선처하겠다'는 플래카드가 면 단위 동네 어귀 곳곳에 내걸렸다. 고요하던 이들 마을에 확성기를 장착한 차량까지 나타나 방송도 틀어댔다.

3·11 농협 조합장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입후보자 A(55)씨로부터 돈 봉투를 받은 주민 수가 너무 많자 선거관리위원회가 자수 권유에 나선 광경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주민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머잖아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돈 받은 사실이 들통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검찰 조사에서 A씨는 20만∼1천만원씩 주민 72명에게 5천만원을 뿌린 것으로 드러나 구속됐다.

농·축·수협 및 산림조합 조합장을 한꺼번에 뽑은 '3·11 동시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러진 비리의 한 단면이다.

이번 선거사범의 공소시효 만료일을 사흘 앞둔 8일 경찰 수사가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타락 양상의 전모가 드러났다.

비리 유형은 과거 선거 때의 복사판이다. 유권자의 표심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공식선거 운동기간 전에 자신을 알리는 사전운동 등이 주류였다. 고가 선물을 돌리거나 향응을 베푸는 고전 수법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선거 출마 포기를 조건으로 거액을 건넸다가 구속된 사례도 있다.

청주의 한 농협조합장에 당선된 B(54)씨는 4개월 만에 당선 무효 위기에 놓였다. 지난 3월 초 조합원 C(64)씨의 사무실을 찾아가 당선을 도와달라며 현금 100만원을 건넨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1심 재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공직선거법과 마찬가지로 조합장 당선자도 징역형 또는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당선 효력을 상실한다.

C씨는 B씨에게서 받은 100만원 가운데 30만원을 챙기고 나머지 70만원은 다른 조합원 3명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형사처벌과 별개로 200만~90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제주도의 한 농협 조합장 D(57)씨도 당선이 수포로 돌아갈 처지가 됐다. 사전선거운동이 문제가 됐다.

선거에 대비해 지난해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합원 260여명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혐의로 기소됐다. "3월 11일 날 잊어버리지 마시고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으로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

경쟁 후보를 188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지만, 법원은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고 선거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며 벌금 150만원을 선고했다.

선거의 투명성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실형의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했다.

창원지법 형사항소3부는 지난 7월 경쟁자에게 출마 포기를 대가로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경남의 한 축협 조합장 선거 후보자 E(57)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조합 감사 출신인 E씨는 지난 1월 현직 조합장에게 선거 출마 포기를 대가로 현금 5천만원을 건네고 1억5천만원을 더 주기로 약속했다가 법정에서 구속됐다.

인천의 수협 조합장 후보였던 F(56)씨는 선거를 앞두고 조합원 6명에게 지지를 부탁하며 현금 120만원을 건넸다가 소문이 돌자 돈을 돌려받으려다 덜미를 잡혔다.

그는 1심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한 축협 이사 출신의 G(56)씨도 구속됐다. 조합장 후보자 H(54)씨에게 선거운동 지원을 대가로 임원직을 요구한 것도 모자라 약속 담보용으로 2억원짜리 차용증을 써달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런 잡음 속에 조합장에 당선한 H씨는 조합원에게 금품을 살포한 별개 사건이 불거져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다.

재선에 성공한 경기도의 한 농협 조합장 I(62)씨는 조합원 1천694명에게 쌀 20㎏ 교환권을 보낸 혐의로 입건돼 5개월째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가 보낸 교환권은 모두 9천396만원어치에 달한다.

I씨는 농협이 주관한 농산물 대축제의 기념품을 나눠준 것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법망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조합장 선출 관행을 바로 잡고자 선관위까지 나서서 전국 동시선거를 했음에도 후진국형 부정부패 관행은 재현된 셈이다.

제도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후보도 제대로 모른 채 투표한 탓에 금품 수수 등 비리가 되레 판을 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따라서 현행 선거제를 유지하려면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선거에 비견되는 여건을 마련하고 보완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이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조합원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할 유능하고 청렴한 대표를 뽑으려면 무엇보다 유권자의 의식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조합 안팎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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