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존감은 그대로 자녀에게 반영된다. 자존감을 가진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감을 심어준다.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할 때, 가족의 일원임을 느낄 때, 능력을 인정받을 때, 믿어줄 때, 독립심을 인정받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맺어줄 때,’(데이빗 칼슨/이관직, <자존감>) 자녀는 자존감이 생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탕진을 하였다. 농장에 가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느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제일 좋은 신발을 신겨주고 금가락지를 키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형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다고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달래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루가15:11-32)

방탕한 생활 끝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돌아온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빨래가 마르는 때, 어부가 그물을 거두고 돌아오는 때,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때. 그 때는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때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든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보다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런 인물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주인공이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선 작은아들이다.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또한 감동적이다. 아버지는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을 기쁘게 여겼다.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 작은아들이 가족임을 인정해주고 그의 자존감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다. 이를 보고 큰아들이 투덜댔지만,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고 달랜다. 동생과 비교하여 잠시 균형을 잃었던 큰아들의 자존감도 자애로움으로 회복시킨다.

마지막으로 감동은 주는 장면은 아버지의 꿋꿋한 자리지킴이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았기에 탕자인 작은아들이 돌아올 수 있었으며, 큰아들도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며 동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자존감을 잃지 않았기에 두 아들의 자존감을 세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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