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은 자존감을 가장 낮은 단계까지 떨어뜨린다. 특히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청소년의 우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식이 우울감에 시달리는 일차적인 원인은 부모이다. 부모의 자존감 및 자녀의 양육방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모가 원인이고 자식은 결과이다. 거슬러 올라가 볼수록 부모자식 간의 인연의 끈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된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어떤 병에 걸려 있었거나 계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면, 또는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이 유년 시절에 질병을 앓았거나 만성적인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면 자살할 확률이 높다.”(폴임 ‘책속의 책1’) 부모는 자식이 어머니 몸속에 있을 때부터 잘 돌봐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골 중학교 L교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인 성민이는 수업시간에 잠만 잤다.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에 취해 자는 줄을 선생님들은 몰랐다. 성민이는 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만 볼 뿐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은 성민이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민이를 놀리고 때렸다. 그때마다 성민이는 그 흔한 욕 한번 소리 내어 지르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혼자서 중얼중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흘리듯이 내뱉는 것이었다. 자존감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는 성민이었다.

L교사가 어느 날 하교 후 성민이를 불러서 이런 저런 말을 시켜 보았다. 말을 무수히 내뱉는데 분명치가 않았다. 성민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성민아 운동장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공 차고 놀래, 아니면 선생님하고 같이 실습장에 가서 풀을 뽑을래. 성민이는 풀을 뽑겠다고 하였다. 이런 날이 계속되었다. 풀을 뽑으면서 가족관계하며 친구관계하며 채소와 잡초들에 관한 이야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하루 성민이가 말하는 단어들이 분명해져 갔다. 실습장의 채소 이름을 하나하나 숙지하고 조금씩 조금씩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오늘 우리의 자식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성민이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는 부모가 자존감을 갖지 못하고 자식에게 자존감을 심어주지 못한 결과이다. 자식을 내팽개치거나 과보호 해 온 과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어떤 부모도 이런 결과에서 자유로울 없다. 이게 지금 우리 부모들의 자화상이다. 그럼에도 자식이 잘못된 경우 부모는 대부분 자식 탓을 한다. 부부가 서로에게 탓을 돌린다. 그리고 국가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학교를 탓한다. 이는 일종의 책임 전가이며, 순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허니문(결혼 후 30일)을 기쁨과 열락으로 보낸 이후 가정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일 속에 묻혀 살게 된다. 그러는 중에 일중독에 걸렸다. 어느 날 문득 가정을 보니 크고 작은 균열로 자잘히 쓸려 있다. 자식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엇나가거나 탈선하거나 중독증에 걸려 있거나 마음에 감기가 들었거나.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부모들만의 힘으로는 치유하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러므로 가정의 문제는 더 이상 가정만의 문제로 치부되어서도 아니 된다. 국가와 사회, 학교와 기업, 사회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L교사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적합한 교사상이다. L교사는 성민이에게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 놀아라 하지 않고 함께 풀을 뽑았다. 함께 풀을 뽑으면서 성민이의 말을 마음으로 들어주고 감정을 읽어주었다. 성민이와 함께 풀 뽑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 갔다. 남의 자식이지만 내 자식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그리고 성민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졌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L교사가 다른 학교로 전근하면서 성민이와 함께 했던 이야기는 과거의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 안타깝다. L교사가 성민이와 함께 했던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더라면 어떠하였을까.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그의 선한 영향력이 햇살처럼 퍼져나갔을 것이다. 성민이와 같이 마음의 감기를 앓는 불특정 다수의 청소년들에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는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문적인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높아졌을 것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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