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자유를 향한 인류의 노력은 근대라는 시대를 역사의 장에 편입시켰다. 선사시대부터 고대를 거처 중세에 이르는 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 왔던 것은 '신(神)'이었다. 이 오랜 원칙을 밀어내며 인간의 '이성(理性)'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생각이 등장했다. 이 때 가장 시급했던 것은 인간이성이 신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신(神)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 채로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시대를 끝내고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맞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추상적 존재인 신이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위해서 왕을 대리인으로 선택했다는 왕권신수설이 소수의 지배자가 국민 모두를 노예로 삼기위한 억지이론임을 증명해야 했다.
   역사가 준 이 역할을 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이 바로 자연법 사상가들과 사회계약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국가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이 신이 간섭할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마저도 이신론(理神論)을 통해 사회구성을 위한 인간의 합리적 사고과정을 신의 간섭으로부터 배제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상태하에서 인간을 지배하던 법칙의 존재를 정당화 시켰으며 이 법칙들에게 ‘자연법(自然法)’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자연상태의 법적 성질이 규명되자 인간은 왜 자연상태를 떠나 국가사회를 이루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인간의 자연상태를 보는 시각에 따라 각기 다른 사회계약론이 대두되었다.  루소(Rousseau, Jean Jacques)는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초기 인류는 가족단위로 사랑과 조화가 유지되는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더 나은 자유를 위해 국가사회를 원했으며 이를 위하여 자연법이 주었던 자연법적 권리를 자율적으로 제한하고 시민적 권리를 위한 계약을 맺었다. 국가는 국민들의 일반의지에 기초한 사회계약의 결과였다. 여기에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는 의견이 등장했다. 성악설(性惡說)로 연결되는 이 이론을 기반으로 홉즈(Hobbes, Thomas)는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이 무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에 의지했다’고 보았다.
   성선설은 인간의 본질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물질적인 욕심과 인간의 본래적 인생관 사이에 거리를 둔다. 따라서 물질에 대한 욕구만으로 인생을 정의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여서 인간성, 정의 등의 추상적 의미를 끼워 넣어 삶의 개념을 완성한다. 이에 반해 성악설은 인간의 물질에 대한 경향을 중시한다. 이 이론의 바탕이 인간을 정신적으로 악(惡)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물질을 차지하려는 근본적 이기심에서 인간은 본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생긴다. 유물론을 앞세운 공산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인간은 절대로 선해야 한다. 마르크스(Marx, Karl)에 의하면 공산주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일할만큼 일하고 자신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를 이룩하게 된다. 이는 즉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간은 꾀를 부리지 않고 일하며,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이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갈 뿐이며 추가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는 본질을 가진다는 뜻이다. 완전한 성선설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가격이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됨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래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가질 수 있을 만큼'을 극대값으로 갖는다고 본다. 따라서 남보다 잘 되려고 하는 경쟁심이나 남을 능가하려는 욕망 그리고 무한한 욕심이 근본적인 인간의 성향으로 분류된다. 성악설의 개입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영란 범은 업무관련성과 대가성 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물질을 구분한다. 먼저, 업무관련성과 대가성이 모두 있으면 가격과 관계없이 위법한 행위가 된다. 업무관련성은 있는데 대가성이 없는 물품수수행위는 3만원까지 허용된다. 업무관련성과 대가성이 모두 없으면 1회에 100만원까지 그리고 1년에 300만원까지 허용된다. 이에 의하면 교수님에게 커피 한 잔을 제공하는 행위,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행위, 선생님의 생일이나 결혼식에 선물을 하는 행위는 모두 업무관련성과 대가성을 가지므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이 손수 만든 카네이션은 경제적 가치가 없으므로 이러한 판단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카네이션을 많이 받아 보았다. 아이들이 만든 귀중한 카네이션이 마트에서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상품으로 나온 제품들보다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야 하는 시대이다. 사회정의라는 추상적 가치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 물질적 개념설정이 우선된다는 생각은 역사가 필연적으로 갖는 아이러니이다. 선생님들은 내년부터 마트에서 파는 상품이 아니라 제자들의 사랑이 묻은 카네이션만을 받게 되었다. 기분좋은 미소가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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