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원 <연극인·연출가>

“야! 오랜만이다. 일원이 아니냐? 그래, 명절은 잘 지냈구? 모두 별일 없지? 그래, 어쩐일로?….”

전화를 받자마자 이쪽 인사도 하기 전에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쪽에서 먼저 부산을 떠신다.

“네 선생님. 이쪽은 다 잘 있습니다. 뵌 지 오래되고 해서 안부 전화 올렸습니다.

“잉 그려, 다행이다. 다 무고하다니 좋다야. 나는 귀가 좀 시원찮아서 그렇지 다른 삭신은 아무 이상 없어. 지금도 가끔 보문산에도 오르고 술도 잘 먹어. 이젠 내 주위의 친구들도 하나 둘 가고 자꾸 홀로 되는 기분이여”

나의 연극 대부 죽헌 최문휘 선생이시다. 올해 90인데도 음성이 쩌렁쩌렁 하시다.

내가 처음 연극에 입문할 때 가르쳐주신 대전의 서라벌 극회 초대 대표이면서 극 연구회(학원) 원장님이었다.

“요즘도 극판에 자주 나가십니까?”

“잉? 잘 못 알아 듣겄어 다시 말 해봐.”

“요즘도 연극 자주 보시냐구요!”

“잉 아녀, 요새는 자주 못 나가, 워떤 놈이 불러줘야지.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전부 즈덜 혼자 큰 모양으로 우쭐대고만 있지 선생 찾는 놈이 없어. 너도 그쪽에서 열심히 하고 있지?”

“네, 저야 뭐 항상 그렇죠. 요즘은 예총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잉 참 네가 충북예총에 수석 부회장이라고 했지? 그랴, 열심히햐, 사람은 모름지기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고 머리를 쉬게 해서는 안되는겨, 나도 가끔 시도 쓰고 향토사 청탁을 받아 쓰기도 했지만 이젠 좀 뜸혀, 아참 이번에 아주 홍역을 치렀다야.”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홍역을 치르시다니요?”

“이잉 뭐 국가기록원이라던가 뭔가 하는데서 와설람은 나를 취재한다고 한 달포는 법석댔어. 왜 하필 나냐고 했더니 나 아니면 없댜. 허허…. 그래서 거기 응하느라고 생고생을 했구먼. 자료 찾아서 응답하느라고 말여. 이젠 몸이 옛날 같지 않어. 뭔 녹음을 그렇게 많이 한댜. 뭔 책을 낸다나벼 책 나오면 한권 보낼테니 봐. 변변찮은 나를 뭐한다고…”

선생님은 항상 소탈하시고 매사에 긍정적이셨다.

그 옛날 서라벌예전을 나와서 영화 평론도 쓰시고 서울 극단 신협에서도 중책을 맡으셨다가 고향 대전에 내려와 그 어려운 환경에서 극단을 창설하셨다.

서라벌극회의 단원을 모집할 때도 통행금지도 무릎 쓰고 밤을 새워 가두에 손수 포스터를 붙이며 열정을 쏟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원의 같은 선생끼리 배우는 연출의 소품과 같아서 연출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지론과 배우도 창의력을 가지고 연기를 창출해야 한다는 측 끼리 막걸리 잔을 나누며 설전을 할 때도 선생님은 과묵하게 허허 웃으면서 바라만 보고 계시는 모습이 이상하게만 느꼈었다.

초짜인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내가 연출을 맡으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왜 결론을 내려 주시지 않으셨어요?”하고 얼마 후에 물었더니 “그런 가운데서 자기 공부가 되는 게야 좋은 현상이지. 선생이라고 다 아는 게 아니니까…” 하시던 말씀의 깊이도 나는 얼마 후에 알았다. 그런 선생님 곁을 떠나온 지도 어언 50여년이 되었다.

내가 청주에서 연극을 하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위안 드리고 싶었는데 시청에 볼일 있다고 가셔야 된다기에 다음기회로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오늘 제가 못 드린 말씀이 있어서요. 선생님은 추억담을 좋아하시잖아요. 옛날에 충북 영동극장에서 ‘고랑포의 신화’라는 연극할 때 극장을 태울 뻔 했던 일, 또 청주 시민관에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공연하다가 조명버튼이 떨어져 입추의 여지없던 관객을 놀라게 했던 일, 괴산 불정에서는 전기가 없어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놓고 공연을 했던 일 등….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많아 오늘 말씀 드리고 한바탕 추억에 빠져볼까 했는데 다음기회로 미루시죠.”

“잉 그랴, 이젠 그런 야기가 나는 좋아. 먼 정치야기며 남 욕하는 야기보다 그런게 좋아. 다음에 듣자구우. 자주 연락혀잉? 그래도 일원이 밖엔 없구먼 허허…”

“네. 선생님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나에게는 연극의 멘토 였고 스승이었던 죽헌 선생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늘 감사하고 있다.

“선생님! 부디 늘 건강하세요.”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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