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주 <시인>

멀리 있는 조카에게서 문자가 왔다.

핸드폰 어플 ‘밴드’에 가족채팅방을 만들었으니 가입하라는 내용과 함께 뜨는 문패가 ‘조씨네 가족방’이다. 조씨네 가족방? 어딘가 촌스럽고 진부한 느낌이 들어 나는 다른 가족들의 의견도 들어 바꾸자는 내용과 함께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우리는 그 나무를 보고 꿈을 키우며 자랐으니, ‘꿈꾸는 은행나무’로 하자는 나의 뜻을 보냈다. 다른 가족의 의견들을 물어 보지도 않은 채 핸드폰의 밴드 화면에 문패가 바뀌면서 수많은 추억의 글과 사진들이 함께 올라오는 게 아닌가?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송평리 은행정엔 국가지정보호수로 지정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고려말 불사이군의 선비정신으로 이성계의 조선건국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낙향하시면서 선조가 심으셨다는 추정수령 칠백여년의 큰 은행나무다. 그 은행나무엔 무서운 전설이 내려온다. 그 은행나무가 세 번을 울면 세상이 망한다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한번 울었고 민족상잔의 비극 6.25때 또 한 번 울어 이제 한번 남았다는 어렸을 때에는 엄청 무서웠던 전설이었다. 그 한번 남았다는 은행나무가 울음을 영원히 울지 않길 바라던 어느 가을밤 태풍으로 세찬 비바람에 그 큰 은행나무가 웅웅거리며 우는 듯한 소리가 마지막 은행나무의 울음 일지 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던 어린 날의 기억이 새롭다.

이제 또 가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마을 앞 그 큰 은행나무는 가을을 제일 먼저 알려 왔다.

계절은 가랑잎 몇 뿌리더니/ 어느새 마른 풀잎 시린 비 내리네/ 건널 다리 하나 없는 이 우울한 시대/ 내 오늘 편지 한장 부치노니/ 부디, 세상 모든 꽃잎 떨어져 눕거든/ 가장 정직한 활자로 읽어주길 비네/ 낮은 햇살 수척한 고향 가을 은행나무/ 몸 낮춰 내일 안부 되묻고 있네/-졸작 ‘가을 안부’

허름했던 이웃들의 아픈 삶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시대의 안부를 되묻던 ‘가을 안부’의 수신인도 이제는 가고 없는 허허로운 고향이다. 지금쯤 맨발로 고기 잡던 시냇가에는 청량하던 물소리조차 사라져 이름 모를 잡초들로 가득하고 황금물결 출렁이든 들녘에는 가을걷이도 끝나 가녀린 가을 햇살로 그득할 터이지만, 잎 지는 가을을 앞에 두고 어린 시절 키 작은 추억들을 더듬으면 이제 그 시절 그 모습은 우리 곁에 영원히 없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쨘해져 온다. 그래 지금의 모든 그리움은 이미 지난 추억의 잔상들이 아니던가?

옛 성인 노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셨다. 결국 사람은 자연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씀 일게다.

그렇다. 가을은 또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라는 약속의 계절일 런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우리는 새로운 한해 힘찬 내일의 발걸음을 내 딛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뼘 남은 가을 여윈 햇살로 마을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며 이 가을을 저 혼자 다가진 양 세상을 황홀하게 만들던 내 고향 송평리 은행정의 꿈꾸는 은행나무의 안부가 한없이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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