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성 <시조 시인>

 

시조문단의 거성이었던 고(故) 월하 이태극 선생님이 애지중지 가꾸셨던 시조 전문지 ‘시조문학’이 선생님의 노환으로 서울여대 명예교수이고 시인인 김 준 박사에게 인계되고 난 후 ‘시조문학’지 발간에 협조하여 달라는 요청으로 각종 문학상 심사위원 및 신인문학상 심사를 도맡아 쓰는 추천위원의 한 사람으로 수년전까지 참여했었다.

1995년 그 해 여름에는 ‘시조문학’지를 협찬하는 (사)시조문학진흥회의 여름 세미나 행사를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위치한 만해 마을에서 가졌다.

만해마을은 스님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이신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마을로 각종 숙박시설을 갖춘 문학관이면서 동시에 수련원이다.

그곳에 가니 신흥사, 낙산사 등 강원도 전 지역 사찰을 관할하시는 조실스님이며 시조시인이신 무산설악 조오현 큰스님이 학교장으로 하늘처럼 우뚝 서 계셨고 스님 방 앞에는 스님을 접견하려는 명사들이 항시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랑 같이 갔던 시조진흥회 회원들도 불자들이 많아 이미 면회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김 박사와 함께 나도 같이 갈 것을 제의해 왔으나 나는 신도도 아니고 또한 그러한 격식이 부자연스러워 슬며시 김 박사를 꼬드겼다. “박사님 그곳에 가면 무조건 스님한테 큰 절을 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불자도 아니고 불편할 것이니 회원들만 올려 보내지요?”

김 박사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 내 제의에 쾌히 따랐다.

얼마 후 무산 큰스님을 모시는 시봉 스님이 헐레벌떡 우리를 찾아와 절을 안 하여도 좋으니 올라오시라는 큰스님의 전갈을 전하며 우리를 이끌 듯 안내하였다. 아마 큰 스님께서 회원들한테 누구랑 같이 왔느냐고 물어보셨는데 한 회원이 우리의 이름을 거명하며 “절하기 싫어서 안 올라 온데요” 라고 있는 그대로 말을 올린 모양이다.

우리가 주춤거리며 올라가니 큰스님께서 자신의 상석을 쾌히 내어주시며 여러 회원들 앞에 나의 문단 이력을 미리 공부해 놓으신 듯 몇 년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제목에서부터 신인예술상 소설 ‘구약신서’가 문학부문에서 특상으로 수상되었고 1969년도 추천 완료된 ‘과수원 마을’제목까지 열거해주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산 큰스님은 이 때 처음 뵈었지만 스님은 필자보다 한 해 앞인 같은 ‘시조문학’지로 등단하셨다. 명쾌하게 나의 이력을 기억하여 주셔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밤 큰 스님의 배려로 김 박사와 함께 특실을 쓰는 혜택을 받았고 그때의 만남이 연이 되어 이듬해 ‘만해 축전’의 일환으로 분단선을 넘어 금강산 호텔에서 이북 문인들과 함께 할 시낭송회 행사에 원로시인이신 고 은 대회장을 비롯하여 장순하, 이근배, 김제현, 김 준, 김교환, 윤금초, 한분순, 박시교 시인 등 많은 문인들과 함께 참석하게 됐다. 비록 이북 시인들이 사전 통보 없이 행사에 일방적으로 불참하여(윗선에서 차단하였다고 한다.) 우리들끼리 시낭송회를 가졌으나 이북 땅에서 펼친 시낭송회와 꿈에도 그리운 금강산을 둘러보고 온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에도 해마다 펼치는 ‘만해 축전’의 일환으로 계간 ‘시조문학’지에 시 송회 및 세미나 등 행사에 수년간 큰 도움을 주시었다. 또한 만해 마을 입구에 영구히 시설된 세계평화의 시벽(詩壁)에 동판으로 국내 시인은 물론 세계 유수 시인들과 함께 필자의 이영도 시조문학상 수상작이기도한 ‘아지랑이’ 작품이 육필로 새겨진 것은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요, 광영이기도 하다.

“아득히 그 속에서 / 서럽게 웃음 지으며 / 가고 있는 거냐 / 뒤돌아보는 거냐 / 못다 푼 숨결로 남아 / 번열하고 있는 거냐. // 우리 이별 없을 때 / 다시 만날 수 있다면 / 이 세상 저 밖으로 / 이름 없이 사라져 간들 / 그 시절 눈물로 되어 / 떠 흐르는 것이냐.//”(시 ‘아지랑이’)

<매주 월·수·금 게재>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