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 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오동지 육섣달’이라 했다. 오월과 동짓달, 유월과 섣달이라는 말인데, 그 속뜻은 동지섣달에 눈이 많이 내리면 오뉴월에 비가 많이 내린다. 는 것이다. 이건 기상청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 그러니까 옛날 순전히 경험으로 앞날을 예측하던 옛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이다. 이 경험이이라는 것이 일이년이 아니고 수십 년 수백 년 동안의 통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무시할 수 없어서 날씨에 목을 매고 닥쳐올 농사를 대비해야 하는 농촌사람들에겐 아직도 민감하게 여겨지는 말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네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동짓달과 섣달에 눈이 많이 와야 내년 오월과 유월에 비가 넉넉히 와서 풍년이 들 텐데….” “그러게 말여, 정월초하루 설이 다가오두룩 눈이냐구 워디 눈답게 왔어야제. 이번 겨울엔 우째 더 안 오네.” “그래두 제법 온 데두 있는가본데 여긴 영 시더분찮여. 그래두 애들 썰매 지치두룩은 와여잖여.” “누가 아녀. 시방, 애들 썰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애덜 때 생각나네. 썰매 멍청 탔지. 눈 왔다 하면 정갱이까지 푹푹 빠지구 신났지 신났어.” “그런데 시방은 워디 그려. 눈 오면 걱정이 앞서지. 나다니기 불편하구 반실반실하게 얼어붙은 눈길에 미끄러져 낙성할까봐 걱정 아닌가?” “그게 다 늙었다는 징조지. 아니, 근데 참 그래서 자넨 시방 겨울에 눈이 하나두 안 와야 좋다는겨 뭐여?” “아니 이 사람이, 시방 내 말은 그게 아니잖여.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이 사람 나이 들으니까 별 걸 다 가지구 시비여.” “여게들, 다들 그만 두게.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 걱정 비 걱정 없는 사람은 우리 동네선 당닭 갸밖엔 없어.” “갸가 뭐여, 시방 당닭 나이가 오십 중반이 넘어 육십이 멀지 않었구만.”
 ‘당닭’은 춘길이가, 키가 작고 몸집이 똥똥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당닭이라는 것이, 몸이 매우 작고 날개는 땅에 닿아서 발이 보이지 않고 볏이 매우 큰 데다 꽁지는 길게 볏에 거의 닿도록 고추서 있는 닭을 이르는데, 이놈과 같이 키가 작고 몸이 똥똥한 사람을 비유해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는 춘길이가 같은 또래들보다 하도 작아서, ‘당닭의 무녀리냐 참 작기도 하다’ 한 데서 나온 것인데 이는 너무 길으니 그냥 ‘당닭’으로만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당닭이 키와 몸집이 하찮아 보여도 여간 다부진 게 아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저 놈 저래도 앙센 놈이라 생활력은 강할껴.” “암만, 암만, 뭘 해도 끝장을 볼 놈이제.” 하고 눈여겨 오는 터이다.
 이 당닭이 장가를 갔는데 사시랑이 색시를 맞았다. 몸이 가냘프고 약해 보이는 사람이다. 한데 여간 사분사분 잘 지껄이는 게 아니다. “일만 아는 퉁바리 당닭이 색시는 잘 만났어. 슬쩍슬쩍 우스운 소리를 해가면서 끈기 있게 사람을 다룬다니께.” “몸은 가냘가냘 약해 보여두 강단이 있어 그 많은 하우스일 당닭하구 다 감당하잖여.” “일철에는 그 안에서 다 일꾼들 읃어 댄다는겨. 얼마나 사분거리면서 사람을 대하는지 안 녹아나는 사람이 없다잖여.”  “그러니께 읍내용역에 가지 않구 인근 동네 여자들만 모아서 다 꾸려가잖여.”
 당닭이 경영하는 30여동(1동이 100미터)이나 되는 수박하우스며 천여 평이나 되는 오이하우스의 일을 두고 하는 소리다. 수박하우스일은 겨울에 밭 갈고 거름 뿌려 준비해서 이른 봄에 묘 심어 가꾸기를 한여름(1차)을 거쳐 추석 임박까지(2차) 해서 출하하는 것이고, 오이하우스는 사철을 매달려 매일 거래처로 보내야 하는 것이니 당닭에게는 겨울도 여름도 없는 것이고, 하우스일이니 눈이 오거나 또 비가 오거나 상관없다고 동네어른들은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걱정 없다고 하는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그만큼 억척으로 사시사철 일에 매달리니 저렇게 걱정 없이 살게 된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당닭의 아들애가 서울서 내려왔다. 군 제대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취직해본다고 학원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고시방인가 고시텔인가에서 기거하는 애다. 매일을 일에만 빠져 있어 고생만 하고 있는 엄마 아버지 같은 시골사람이 되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올라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눈치가 이상하다. ‘아버지, 엄마!….’만 해놓고 말이 없다. 당닭이 이러는 걸 보자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시골도 말이다 일거리 많다. 그런데 일할 사람이 없어. 저만 맘먹으면 왜 돈을 못 벌어. 하루 일당두 아르바이트보담 훨씬 낳지. 당장 우리 집일이 손이 딸린다. 너 내려온 김에 엄마 아버지 일, 아니 우리 집일 같이 하자. 그러면 우리 더 많이 벌 수 있어. 어떠냐?” 그제야 아들애의 얼굴이 확 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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