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원(신성대 교수)

▲ 신기원(신성대 교수)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사태와 관련하여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헌법재판소에서 변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심판 일정이 다가오면서 정국은 점차 뜨거워지고 있다. 소위 이념에 따른 진영논리를 내세우며 전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촛불집회가 주를 이루었으나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이에 대한 대응성격으로 태극기집회가 등장하고 양 진영이 참가인원의 우위를 내세우며 헌법재판소를 압박하는 형국이다.
 촛불과 태극기가 원래 이렇게 사용되었던 것인가.
사실 촛불은 종교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은 수도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자기희생을 통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의미로 회자되곤 하였다. 필자 역시 예전에 피정을 하면서 촛불과 관련하여 그런 종교적인 교훈을 얻었었다. 과거 전기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 촛불은 시골에서 생활하는데 필수적인 생필품이었다. 방학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저녁에는 의례 등잔불이나 촛불이 출현하였다. 당시 중소도시에서는 그래도 전기불이 들어와 촛불은 전기가 나갔을 때나 등장하였지만 할머니 댁에 가면 그렇지 않았다.
 촛불은 미약하지만 주변을 태울 수 있기 때문에 힘을 갖는다. 과거 뉴스에 등장하는 화재를 보면 촛불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촛불이라고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촛불이 산불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작은 촛불이 모이면 산불을 능가할 수도 있다. 또한 촛불은 도구가 있어야 켤 수 있다. 스스로 주변을 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지도 못한다. 촛불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발화도구가 있어야 한다. 이밖에 촛불은 사위가 어둠에 잠겨있을 때 위력이 나타난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한 점 촛불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다 준다.
 한편 태극기는 전쟁이나 스포츠 또는 행사장에서 주로 등장하여 애국심을 일깨워준다. 그동안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등장한 태극기나 특히 한·일전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는 애국심 그 자체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주는 감동은 국민들에게 잠재된 대한민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각자 되새김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태극기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일체감과 공동체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태극기를 흔든 적이 언제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기억이 희미해진다. 아마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이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애국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태극기를 가지고 하는 행사에 참여한 경우가 그만큼 없었다는 것이다.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장소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 생일잔치에 태극기를 흔들 수는 없는 것이다. 태극기가 소중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 탄핵소추를 찬성하는 집단은 촛불을 들고 탄핵소추를 반대하는 집단은 태극기를 들고 있다. 어느 집단이 옳은 것이냐의 논쟁은 부질없는 것이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촛불을 든 사람이 다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태극기를 든 사람이 다 애국심을 주장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자발적으로 참석한 사람도 있고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촛불과 태극기가 한 광장에 모여서 끝장토론을 했으면 한다. 몇 가지 규칙에 합의한 후 자기진영의 입장을 내세울 대표선수를 뽑아서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불신 그리고 분노만 표출하는 갈등의 광장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 그리고 단결을 도모할 수 있는 통합의 광장이 필요하다. 촛불로 태극기를 불태우거나 태극기로 촛불을 끄려고만 해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촛불과 태극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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