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 (중부대 교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말을 할 때도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나의 말을 어떻게 전할까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남의 말을 듣다가도 끊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기도 하고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비밀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SNS에 글을 올릴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글을 쓸 때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누구의 가슴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매번 글을 올리고는 돌아서서 반성을 한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마무리하곤 한다. 눈으로 읽지 말고 몸으로 읽으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고, 언론의 무능함을 질타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문헌공도 좌랑공파 34세손으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공부는 잘 했지만 아버지는 큰형만 서울로 유학보내고 나머지 아들들은 시골에 살도록 하였다.

농사나 지으라는 뜻이었나 보다. 태어나기도 약하게 태어났는데, 공부까지 못했으면 구박덩이였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공부는 제법 하는 편에 속해서 시험보고 나면 때리는 친구들이 없었다.(이 얘기는 시험보기 전에는 괜히 때리는 덩치 큰 놈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필자의 세대까지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시골의 고등학교는 시험공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었기에 빈둥거리며 중학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립고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으니 진학할 학교는 정해져 있었고, 그 정도 못 들어가랴는 식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형처럼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어느 집이든지 큰아들이 잘 돼야 나머지도 잘 된다는 공식이 있었다.

지금은 필자도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때가 되었다. 서울로 유학했던 형은 교직에서 은퇴하고, 필자의 아내마저도 명퇴하여 집안에 11명이나 되던 교사가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았다. 돌아보니 다 부질없는 일들이었는데, 그 때는 왜 그런 것들이 다 그리도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야윈 편이라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29kg밖에 나가지 않았다. 시골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읍내 중학교에 갔을 때 첫날부터 나를 때렸던 방**(이 친구는 중간고사 보고 나서부터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우리 반도 아니면서 지나가면서 툭툭 건드렸던 옆반의 덩치(이름은 잊었다), 군에 있을 때 지독히도 나를 못살게 굴었던 고참(늦은 나이에 입대했는데 나이 많다고 때렸던 강완*) 등등 많은 사연들이 모두 나만 미워하는 것처럼 느꼈던 일들이다. 나만 외톨이인 것 같았고, 나만 미워하는 것 같았고, 나만 힘든 것 같았다. 뒤돌아 보면서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누구나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또한 “나만 미워해.” 하면서 늙어 왔단다. 사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겪는 아픔이지만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만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건전한데 친구들이 못났고, 나는 성실하게 살았는데 주변에서 나를 핍박했고, 나는 최고로 똑똑하데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그렇다.

그렇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가 보다.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중심으로 돌려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는 나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았다면 이제부터는 주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나를 맞춰보면 어떨까? 그러면 다투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함께 돌아가게 될 것이고 더 큰 원을 만들면서 화합하게 될 것인데 왜 그 진리를 이제야 알았을까? 모두가 함께 돌아가 보자. 어차피 지구도 돌고, 태양계도 돌아가는데 그냥 함께 돌아가 보자. 나만 미워해 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도록 나를 비우고 배려하면서 살아보자.

탄핵이든 기각이든 이번만은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함께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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