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 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양아버지가 새 아낙에게서 아들을 보았다. 그러니 인제 양아들인 군장인 쓸모가 없게 됐다. 아들을 보지 못해 양자를 들여놓는 것인데 그래서 군장이가 양자로 들어온 것인데, 이 양아버지가 내 핏줄을 보았으니 남의 핏줄인 군장이의 처지는 하등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13살 나이로 처음 양가에 들어섰을 때 양모가 마당까지 뛰쳐나와 손을 덥석 잡으며, 아이구, 우리 아들 왔네. 나이 치군 듬직하구먼. 인물두 좋구. 어서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구.” 하면서 등을 어루어루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참해보이고 양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분이 딸만 여덟을 낳아 어려서 모두 잃고 단산을 해 양자를 들여놓는 것이라고 생가부모는 말했다. 특히 생가 어머닌, “어쩔 수 없어 니를 그리로 보내지만, 인제 니한테는 양부모가 부모다. 특히 양어머니 되시는 분은 딸을 여덟이나 낳았으나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니 그 분 마음이나 처지가 어떻겠느냐 같은 지어미처지라 내 다 안다. 알고 말고 지. 그러니 양어머니 잘해 드려야 한다.” 하고 당부했다. 정말로 양어머니는 지아비인 양아버지께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다. 별로 잘못한 기미도 없어 보이는데 그야말로 개 나무라듯 갖은 폭언을 쏟아 붓고, 묻는 말에 대답이 느리다고, 시키는 일에 몸이 굼뜨다고 손찌검까지 하는 거였다. 그래도 양어머닌 아무런 대꾸도 항거도 하지 않고 이런 지아비의 학대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거였다. 이런 양어머니가 하도 딱해서 군장이가 하루는 양어머니 편을 들었다. 그날도 양아버진 양어머니의 얼굴을 쥐어지르려고 손을 들고 있었다. 숭늉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왜 이리 더디게 가져오느냐는 게 꼬투리였다. 군장인 양어머니를 향해 들어 올린 양아버지의 팔을 슬그머니 가로막았다. 그리곤 침통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전에 없는 일에 양아버진 가로 막힌 팔 그대로로 군장이의 얼굴을 보는 얼굴표정이 일그러지는듯하더니 벌떡 일어나 휭 하니 나가버리는 거였다. 그때 양어머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니 아녔으면 못 볼 일을 또 니한테 보일 번했다. 그래도 니 오고부턴 많이 수그러진 게다. 봐라.” 어머닌 머리털을 헤집어 보인다. 거기 군데군데 딱지가 말라붙은 채로 남아 있다. “툭하면 대꼬빠리로 톡 때리구  톡 때리구 했던 게야.” “담뱃대의 담배 담는 대통으루요?” “그려” “그래두 가만히 있었어요?” “버림치 형편에 별 도리 없제.” “버림치요?” “그려, 딸자식 여럿 났으나 죄다 죽구, 대 이을 아들 못 낳았으니 아녀자로선 이제 못 쓰게 된 것이나 다름없지 뭐. 버림치가 뭐여, ‘못 쓰게 되어 버려진 물건’ 아녀? 그런 처지이니 구구이 참고 지낼 수밖에.”
 이 양아버지가 군장이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 불시에 새 아낙을 들인 것이다. 이미 배불러 들어온 새 아낙이 두 달 만에 사내애를 낳았으니 인제 군장이도 버림치나 다름없게 되었다. 양자의 자리가 이미 퇴색해버리지 않았는가. 그런 상황에서 양어머니는 말수를 잃은 채군장일 바로 쳐다보질 못한다. 그래서 군장인 양어머니께 물었다, “엄니, 저도 인제 버림치가 됐으니 파양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러자 양어머닌 맥이 착 가라앉은 소리로, “애비가 정 그런 결심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제. 하지만 입때꺼정 애비 바라고 살아온 내는 그렇게 되믄 팍 죽어뻐릴란다. 누구 바라고 더 살까!” 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는 거였다.
 이튿날 그는 양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님, 아무래도 제가 어머니 모시고 따로 살림을 나야겠습니다. 그게 양 쪽이 편할 것 같은데 아버님 의향은 어떠십니까?” 그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양아버진 대뜸, “거 참, 훌륭한 생각을 했구나. 그러면야 니 말따나 양 쪽이 좋구말구지.” 이래서 그는 양어머니와 함께 동구 밖 외딴집으로 따로 나갔다.
 이후 새 동생은 자라면서 형인 군장을 잘 따르고 양어머니한테도 살갑게 굴었다. 그런데  양어머닌 이 새 동생을 당신 앞으로 올리려는 걸 알고 당신이 희생할 터이니 생모 앞으로 올릴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군장이 극구 반대했다. 양어머니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어언 새 동생 나이도 중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이 무렵 양어머니는, 지아빈 아직도 팔팔한데 골골하는 병색이 짙더니 마침내 운명할 것을 지레짐작했던지 군장을 불러놓고 심각하게 말한다. “버림치 주제에 대 이을 아들을 셋이나 보았으니 그만하면 내 도리를 다했다 할 수 있어. 이게 다 애비 덕분이지. 그런데 애비 어린 동생 말이야 이제 제 엄마 앞으루 올려 줘. 그 어미까지 버림치 돼서는 안 되잖여.” 하지만 군장은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면서도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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