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사회심리학의 대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무색무취한 자기 개발서에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사랑이 인간본능의 영역임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새겨듣는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던 칼 막스의 적통자로 자임하던 그이기에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중이라는 태도는 설득력 있다. 사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면 사회관계 속에서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 속절없는 애증과 어깃장 같은 단절의 마디들로 채비된 서늘한 이별을 누구나가 경험으로 소유한다. 그래서 존재는 늘 불안정한 관계의 미로 속에서 무리간의 연결과 위로를 탐색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건조한 과거경험으로 잔소리하는 늙은이를 통칭하는 ‘꼰대’라는 날선 용어는 인간본능인 사랑과 사회적 관계지향을 막아서는 청년들 사이의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어른의 경험치를 ‘꼰대’의 추억일 뿐이라고 청년들이 굳게 믿는 이상, 세대 간 소통은 애시 당초 요원하다. ‘요즘 애들’이란 체념과 부정으로 어른들은 청년을 규정하고 그들은 어른들을 ‘꼰대’로 호칭하니 오늘날 세대갈등은 실존하는 사회문제로서 논의되어질 사회학의 의제라 할만하다.

‘꼰대’의 무료한 말은 귀 기울일 생각 없는 청년에겐 앙금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 난 글로 소통해보기로 작정했다. 본디 글은 슬픔의 자화상이다. 세상의 모든 글은 슬픔의 데생이다. 그렇게 자기 치유를 위해 쓴 글은 또 다른 고단한 타인에게 살포시 위로를 건네는 치유의 도구이다. 카카오 톡도 유용하며 단문 문자도 꼰대‘의 말을 전하기엔 더없이 좋다. 선인들은 나이가 들면, 미움과 슬픔이 가슴에 차오를 수 록 말수를 줄이고 들으라 하셨다. ‘꼰대’라 불리 우는 기성세대가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에게 과거의 기억으로 무장한 채 언어로 감정을 주고받는 교감을 나눈다니 그것은 얼마나 막연하고 끝내 상처만 남기는 시도인가 각성하기에 말보다 글을 택한 나의 처세가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지만 무리 없을 수도 있겠다.

지리멸렬한 나의 처세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집단에 관한 고민보다 개인에 대한 고민에 몰입하는 것에 대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고백하건데 청년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 기회를 우리 어른들이 아니 나 자신도 솔선해서 제공해주진 않았던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고용여력이 없다는 냉담한 사회를 뒤로하고 고립되어가는 청춘들에게 ‘꼰대’의 확신에 찬 경험이 무슨 수용력이 있겠는가. 따져 묻자면, 오늘날 청춘의 상실감 앞에 미안한 마음으로 진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은 어른들이다. 신념에 찬 평생직장의 기억으로 집단에 대한 희생의 가치관으로 오늘날 이직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간다면 ‘꼰대’라 불리 워도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열정페이류의 ‘꼰대질’로 청춘을 윽박지르면 세대 갈등은 치유되기 불가하다. 고용의 시대갈등이 본질임에도 말이다.
 
유실된 기억이 그러하듯 내려놓음도 삶의 방식이다. 무엇을 얼마나 내려놓을지 선별하는 일이 어른들의 품격을 결정한다. ‘꼰대’를 타파한다. 공고했던 일자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일자리를 나누는 일, 청년고용을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일은 노동기본권을 저해하는 자본적 잣대가 아닌 공생과 청년을 보듬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청년들이 과거를 오늘에 대입시키려는 무리한 시도라고 어른의 말을 규정해버리는 이상 기성세대의 역할은 지극히 협소해진다. 그로 인해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프롬이 역설한 존중의 미학은 거세되고 '차이의 이해'가 결여된 ‘꼰대질’이라는 부정어로 어른의 말은 사장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청춘들에게 보편타당하기에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고 굳게 믿는 것은 ‘꼰대’의 자기발현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만이 청년은 어른의 경험을 오늘의 지혜로 받아들일 것이다.

“비정규직이면 어때”, “허드렛일이라도 무조건 해라”, “우리 땐 다 그랬다”, 신념에 차서 깬 어른은 '애정'만 기억하고, 납득하지 못한 채 깨진 청춘은 '반발'만 남는다. 우리사회 고용의 변화 속도가 시대의 불화를 가져왔다. 퇴직금의 노후보장 신화가 소멸된 사회에서 일자리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획기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이상 ‘꼰대’는 확장된다. 그 거칠고 촘촘한 ‘꼰대’의 그물에 속박당하지 않으려거든 시대의 차이를 인정하고 청춘들의 실존적 상처에 일자리나누기로 서둘러 답하는 일, 세대통합을 위한 우리 ‘꼰대’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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