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 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하는 말이나 글 중에 많은 부분이 이래라저래라 하고 가르치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전문적인 식견이나 비전을 알려 주는 것이지만 어릴 때부터 잔소리하는 환경에서 자란 시민들에게는 때로 짜증이 나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이러한 메시지는 탈근대 혹은 미래지향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지만 결국은 계몽적 관점 즉 가르치려고 하는 꼰대적 입장이 아닐 수 없다. (이 글 역시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니 잘 봐 주시길. 싫으면...쩝)

계몽(주의)이라는 것이 인간이 지닌 理性의 힘을 믿으며 17,8세기 유럽의 기존 질서나 오래된 혹은 잘못된 습성을 타파하려는 사상적, 행동적 측면의 노력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인간의 이성이 완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것들이 많은 부분 고정관념이거나 심지어 틀린 지식과 정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의 전광판이나 현수막으로 ‘졸음 운전시 80% 사망’, ‘졸음운전의 도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와 같은 문구는 물론 노견(늙은 개가 아니라 길 어깨란다)없음, 배수로 통로, 야생동물 보호구역, 졸음 쉼터, 지자자체들의 무척이나 많은 축제 현수막도 0.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통과하게 된다. 혹자는 안전 운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고속으로 진행하는 자동차에서 그런 메시지에 시선은 물론 생각을 뺏긴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닐까. 사람의 눈이 자극에 반응하는 속도는 빠르지만 기억은 그다지 오래 못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위의 문구들은 사실 효용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속도제한이 없다고 알려진 독일의 아우토반은 물론 해외의 많은 도로에는 별다른 표지가 없는 것은 왜 그럴까. 이들은 운전자들에게 잔소리 같은 말을 하기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이러한 내용들이 운전에 방해가 되어서 그러한 말을 안하는 것일까.  

우리 옛 속담에 빗자루 드니까 마당 쓸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알아서 다하도록 믿어주고 기다려주면 될 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어떨까.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 이성에 대한 의심만큼이나 신뢰 역시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중앙정부는 물론 지자체, 공공기관 등등에서는 여전히 대중의 수준을 아주 낮게 평가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이른바 계몽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설마 그렇게야 하겠는가 싶기도 하다만 실제로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그러한 생각을 확신시킨다. 일전에 가본 어느 카페에서 나이가 든 사람에게 카페 종업원이 테이크아웃 혹은 테이크 어웨이라는, 포장을 해서 가져가겠다는 의미의 말을 대신해서 여기서 드실런지요 아니면 밖으로 ..뭐 이런 식으로 응대하는 것을 봤다. 그 나이 든 사람이 영어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지레짐작 혹은 편견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아니면 배려의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겠으니 해석은 각자, 각자가 하면 될 일인데 아무튼 이성적 판단, 이성적 행동, 혹은 합리적 사고라는 말조차도 완벽하지 않다는 즉, 이렇게 생각하는 자 자신조차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해야하는 것이 인간인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제 인간의 완벽성은 가능한 것인가. 아마도 모르긴 하지만 노력할 뿐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희망하는 한 절망을 할 수 밖에 없는, 즉 허망한 욕망을 추가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님 말고 식의 얘기라 이 또한 부끄럽다. 그래도 T. S. 엘리엇은 4월이 잔인하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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