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몇일 전 충북도지사 관사였던 청주의 충북문화관에서 문화가 있는 날 행사가 열렸다. 이른바 문화가 있는 날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을 지정해서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시민들이 즐기도록 한다는 취지로 이전 정부의 문화융성위원회에서 만든 것인데 새 정부에서도 계속된다고 한다. 아무튼 이날의 행사에는 기타와 노래, 그리고 삭스폰 연주와 시낭송이 싱그러운 5월의 바람과도 무척이나 근사하게 잘 어울린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이 날의 사회를 본 젊은 공무원의 진행이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사(上司)가 시켜서 한다고는 했지만 복장이나 태도가 아마추어의 신선함에 프로페셔널의 준비정신이 더해져서 보기에 참으로 좋았다. 이렇듯이 우리의 삶은 비자발성 혹은 비의도성 등등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최근에 우리 연구원에서 열렸던 한성대 미술대학의 홍명섭교수의 <현대철학의 예술적 사용>로드쇼도 여기에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홍교수는 이러한 비자발성, 비의도성과 관련해서 거미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즉 기존의 예술적 행위 혹은 표현이 표현된 것만이 작가의 의도로 이해되었는데 이렇듯이 표현과 작가의 의도와의 갑을 혹은 주종, 단선적인 관계는 사실상 맥락 혹은 분위기는 물론 관객의 의도나 입장에 의해서 그 때마다 다르게 해석이 되니 거미처럼 거미줄을 잔뜩 쳐놓고서 걸리는 먹이를 거미의 취향과는 관계없이 먹는 그런 우발성에 주목을 해야 하며 이러한 우발성이 표현의 빛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관찰자에 따라서 관찰대상이 달라진다는 코펜하겐 정신(copenhagen geist)과 매우 유사하다.

앞에서 언급한 행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분의 삭스폰 연주 혹은 퇴직한 공무원의 노래처럼 본업이 아닌 분들의 공연으로 구성되었는데 공연을 감상하던 중 드는 생각은 이들은 예술가일까 아닐까? 예술가의 기준은 무엇이고 예술은 무엇인가였다. 다른 직업 없이 전업을 해야만 예술가인가? 아니면 예술대학을 졸업해야만 예술가일까. 1년에 몇 번 연주나 전시를 하면 예술가일까. 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사이에 준전문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도 저도 아닌, 아마도 예우차원에 그리고 사실은 아마츄어 예술인들을 등쳐먹으려고 하는 표현이 아닐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술이란 관객과의 소통이 아닐까 싶고 이 경우 가장 확실한 소통은 인정(認定)이며 가장 확실한 소통은 작품구매라는 홍교수의 언급도 그럴 듯하다. 아울러 예술이 오락과의 차이 혹은 아마추어와의 차이는 바로 인정은 물론 사회에 불편함 때로는 불손함을 던져 주는 것 같다. 즉 즐거움이나 만족을 주는 것이 오락의 역할이며 동시에 이제는 창의성 역시도 디자이너의 역할이지 예술가의 몫은 아니라고 앞에서 언급한 홍교수는 강조했다. 그렇다. 예술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틀을, 관습과 제도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이 그 역할임은 우리가 만든 이른바 문화 혹은 제도나 관습이 완전하지 못함에서 그러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완전하다고 완벽하다고 믿는 순간 주변은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아왔다. 정치적으로 독재정권이 그러했고 이른바 땅콩과 라면 등으로 몰락한(할) 거대기업 집단의 무능한 아들, 딸들 역시도 그러한 오만과 독선의 자식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본다면 예술과 예술 아님의 차이는 아름다움의 준재여부 보다는 특정 현상에 대한 태도 즉 사회에 불편함을 주는, 식상한 얼음을 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앞으로 감히 예술하고 있네라는 표현을 비양거림에 사용할 일은 아닌 듯싶다. 자끄 라깡이 말했다는 ‘너는 네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곳에 있는 것이 너다’라는 말이 가지는 비의도성 그리고 잠재된 욕망을 만나려면 결국 예술을 해야할 듯싶다. 예술 할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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