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인간의 본성을 밝혀서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도출하려는 노력은 성악설(性惡說)과 성선설(性善說)을 탄생시

켰다.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인 순자(荀子)로부터 기원되는 성악설의 지지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한 것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인(仁)을 본성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자연법인 예(禮)를 현실화한 법(法)의 강제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예를 숭상하는 파’ 즉 숭례파(崇禮派)라 불리었다.

이에 반해 맹자(孟子)는 공자의 ‘인(仁)’을 바탕으로 성선설을 완성한다. 이들은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의 능력을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본래적 특징으로 해석했다.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는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항목들로 이해되었다. 이 원리들은 모두 선(善)에서 나온다. 성선설이 자연스레 도출될 수밖에 없음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서양에서 인간 본성론은 근대국가의 탄생근거로써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근대의 태동기에 시민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 권력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했다. ‘사회계약’의 정당성은 신에서 왕을 거쳐 시민으로 이어지는 계급체계가 자연에서 출발하여 시민을 거쳐 왕으로 연결되는 서열의 역전을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하기위해 계약의 주체인 사회구성원들의 본성이 먼저 정립되어야 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자연상태를 정의한 것은 신의 명령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의 계약이 ‘법’과 ‘질서’의 근본임을 확인하는 홉즈(T. Hobbes)의 방식이었다. 법을 시행해야 하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괴물 이름으로 묘사한 것은 국민위에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그의 논리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루소(J.J.Rousseau)의 ‘일반의지’는 시민의 주권자로서의 자격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도구였다. 그것이 바로 계약을 위한 근본적 법률행위구성요건이며 자발적 ‘사회계악’은 지배자에 대한 시민의 복종이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주권행사행위였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발적 주권자의 지위는 본성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갖는 자연적 현상이었다. 근대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야하는 의무는 여기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되었다.

현대에서 ‘선’ 또는 ‘악’을 하나만 취해서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반적 본성으로 확정하려는 사람들은 많은 수를 확보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과 악의 양면적 특성이 사람에 따라 그 구성의 비율을 달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본성적 측면이 아닌 후천적 성장환경이 한 사람의 내면적 성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편입되자 근대까지의 본성론이 설 자리는 더욱 없어지게 되었다.

본성론의 실익이 설 자리를 잃은 현대에서 이를 들먹여야하는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육현장에서의 학생과 교육시스템이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인간의 본성으로 택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교과과정과 그 이행 시스템은 홉즈의 ‘리바이어던’처럼 학생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제해야할 항목들이 무수히 많다. 첫째, 공부는 생리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둘째, 따라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면 게임이나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려하며 공부는 하지 않는다. 셋째,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게 한다면 공부는 안 하고 게임이나 SNS에 몰입할 것이다. 넷째, 복장규정, 금연규정 등이 없으면 학생들은 미풍양속을 해칠 것이며 스스로의 생활을 선용하지 못 할 것이다. 등등...

그런데 이 모든 생각은 아이들의 본성을 ‘성악설’적으로 판단한 결과에서만 나온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겪은 일로 주변을 판단한다. 휴대폰을 늘 지식축적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사용을 금지시키는 일은 효율적인 공부를 방해하는 시도로 해석된다. 휴대폰을 게임도구로 활용하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게임을 할 뿐이다. 이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교육개혁을 논해 보았자 그 결과물은 모습을 약간 달리한 리바이어던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인성의 바탕을 이루는 본질은 본성이 아니라 교육과 그 이행환경의 산물이다. 적어도 교육에서는 그렇게 파악해야한다. 그래야 올바른 교육이념과 방법을 확보할 수 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