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손자와 손녀딸이 제일 먼저 나갔다. 나가면서 손자가 말했다. “할머니, 일요일인데 하루 종일 혼자 계시겄네. 어떡하지요 적적해서. 이따 식구들 다 나가면 경로당에 가셔서 노셔요.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마시구. 알았지요? ‘쪼옥’.” “그래 알았다. 이 할미 뒷일은 걱정 말구 오래간 만에 친구들하구 잘 놀다 와. 나두 한번 뽀뽀 좀 해보자 ‘쪽’” 읍내 고등학교 1학년짜리가 날마다 학교에서 늦게 오더니 오늘은 모처럼 제 친구들 몇이서 어디 바닷가로 놀러간다나 로 마음이 들떠 있으면서도 할미를 챙긴다. 참 기특한 녀석이다. 손녀딸도 제 오라비가 그러는 걸 보고, “할머니, 우리 할머니, 나두 ‘쪽’,” 그리곤 “이따 올 때 할머니 좋아하시는 호떡 사올게 나 없다고 울지 말구 기다리셔. 빠이, 빠이!” 중학교 2학년짜리다. 제 학교 단짝하고 어디 놀러가자고 약속했단다. 막내면서 계집애라 그런지 여간 살갑게 구는 게 아니다. “알았어. 너두 이 할미 뒷일은 걱정 말구 재밌게 놀다 와.” 그리곤 아들내외가 나갔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두 내외가 동반해서 나가느라 그런지 몰라도 웬 놈의 절차가 그리도 까다롭고 번거로운지 보내는 사람의 진이 다 빠질 번했다. “여보, 챙길 것 다 챙겼지?” “내 챙길 건 설거지 마치면 챙길 테니까 당신 거나 당신이 챙겨요.” “내 옷이야 다 챙겨 입었지만 오늘 가지고 갈 것들 말여.” “가지고 갈 게 뭐 있어요. 다 계에서 준비한다는데.” “그래두 소화제 같은 구급약이며 이따 밤에 올지 모르니 저녁 식후에 먹는 약들은 챙겨야 하잖여.” “거야 집에 와서 먹어두 되는데 정 챙길려면 당신이 챙겨요.” 아들이 제 아내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약을 챙겼는지 잠시 후 나왔는데, 며느리가 치마 앞자락에 물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빨리 서둘러 시간 돼가” “알았어요. 화장 좀 하구요.” “대강 찍어 발러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뭐. 시간 없어.” “그래두 어디 그래요. 모처럼 관광지 간다는데 썬 크림인가 뭐는 없어 못 발러두 그냥 크림은 발르구 가야지요.” 그러더니 잠시 후, 며느리가 제 남편을 부른다. “당신 잠깐 들어와 봐요.” “뭐여, 왜 그랴?” “나 입은 거 이거 어때요” “그건 또 원제 샀어?” “지난 장날에 오늘 입구 갈랴구 샀어요. 어때요 괜찮어요?” “좀 야한 것 같은데에. 그래두 괜찮어.” “그렇지요? 훨씬 더 젊어 보이지요? 난 아무꺼나 입어두 어울리니까요.” “아서, 그래두 제 몸 제가 추스르는 것 아녀.” “그렇다는 얘기지 무슨 말을 못해.” 그러더니 아들이 문을 나가면서, “엄니, 우리만 다 가서 어떡해유. 아이들 여름방학하믄 엄니 모시구 놀러 갈 꺼니까 그리 아셔요.” “알았다. 알았다. 내 걱정은 말구 어여 갔다 와!” 그랬는데 이번엔 며느리가 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어머님, 방 정리두 못하구 가니까요 고대로 가만히 두셔요. 제가 와서 다 치우고 청소할 테니까요. 알았지요.”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제 남편을 따라가는 거였다. 그 뒤에 대고 큰소리로 소리쳤다. “뒷일일랑 걱정 말구 어여 잘 갔다와!” 이러는 걸 다 보고 있던 영감이, “내도 인제 나갈 틴데 오늘 임자한테만 끝장을 쥐게 해서 워특햐?” 하고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게 무슨 말여유?” “임자 혼자에게 뒷일을 맡겨서 안 됐단 말여.” “난 또 무슨 소리라구요. ‘끝장을 쥔다.’ 라는 게 그런 말여유. 난 또 노름판에서 하는 소린가 했어유. 근 그렇구 영감두 얼른 나가봐야 하는 것 아녀유?” “봉고차가 마을회관 앞으루 열시 반까지 온닥 했응께 인제 슬슬 나가봐야제. 그나저나 혼자 있다구 점심 거르지 말구 잘 챙겨 먹구려.” “그래두 나 끼니 걱정 해 주는 사람은 영감밖에 없구려. 내 뒷일은 염려 붙들어 매유. 영감 말따나 확실하게 끝장을 쥘 테닝께.” 이렇게 영감도 나갔다. 인제 할머니 혼자 남았다. 둘러 보니 나간 자리가 엉망이다. 정신이 사납다. 아무렇게나 이방저방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어질러져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간추려 장에 넣을 건 넣고, 횟대에 걸건 걸고, 세탁기에 넣을 건 넣고, 손빨래할 건 주물러 빨고, 그리고 방이며 봉당을 말끔히 청소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찬밥에 물말아 대강 먹고 서둘러 마을 경로당으로 내달았다.

“아니 다 저녁때 왜 인제 오누?” “그렇지 않아두 오늘 안늙은이들 저녁은 여기서 해먹자고 해서 부랴부랴 왔는디 발써 다 안쳐놨나베?” 그때 장군이 할매가 들어오면서. “댁 영감님 집으루 들어가시던디.” 한다. ‘뭣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남? 그럼 다들 곧 들이닥치겄네. 얼른 가서 밥이래두 안쳐놔야지. 뒷일은 걱정 말라고, 확실히 끝장 쥔다 했는데…’

할머닌 허둥지둥 집으로 내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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