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사람의 내면은 감성과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각각 독립된 축으로 삼아 베풀어진 좌표평면이 인생이란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독립변수의 장이다. 인간은 이 평면의 어디엔가에서 생의 매 순간마다 감성과 이성의 좌표를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이란 새로운 축을 생성해 나간다. 감성과 이성이 같은 독립변수이면서도 서로 다른 축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인생이란 생산물을 제조함에 있어서의 기본 조건인 ‘현실’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라는 예술사조가 있다. 낭만주의, 추상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등의 여러 다른 용어들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이성과 객관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와 감성과 주관으로 대표되는 사실주의라는 두 축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아류들이다. 결국 인간은 고전주의적 이성과 사실주의적 감성의 조합 중에서 어느 점을 정하여 자신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을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결정으로 삶의 순간들을 형성해 나간다. 역사의 흐름을 보면 객관주의는 이성주의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주관주의는 감성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성은 심리적 작용이지만 우연성보다는 일관된 법칙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논리와 직접 연결될 확률을 더 가진다. 반면 감성 역시 심리적 작용이긴 하지만 논리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유를 바탕으로 비논리마저 인생의 한 부분에 편입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고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한다. 그리스는 이성적 고전주의를 정의하고 로마는 감성적 사실주의의 모범을 보인다. 그리스 시대에서 이성적인 사람들은 내면적 아름다움이 아닌 육체라는 객관을 기준으로 사람의 격(格)을 평가했다. 고대올림픽에 참가하는 청년들은 본 경기가 시작되기 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관객들의 객관적 평가 앞에 서야 했다. 이것이 현대 올림픽의 서주(序奏)인 개막식의 모체(母體)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은 ‘감성적’ 또는 ‘주관적’이란 모호한 개념을 버려야 했다. 완벽이란 용어는 객관적일 때만 허용될 수 있었고, 이는 고전주의적 클래스로 가시화되었다.
  고대 건축의 전형(典型)을 탐구했던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수학공식으로 요약한 법칙(canon)에 따라 미인은 발뒤꿈치에서 발가락 끝까지의 길이가 자신의 키의 7분의 1이어야 하고, 얼굴의 길이는 전체 신장의 10분의 1이어야 하며,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는 신장의 4분의 1이어야 했다. 외모가 고전주의적 비율에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감성기관을 자극하는 요소로서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경험은 감성과 주관적 판단으로 버무려진 사실주의를 로마에 선물했다. '잘난 사람'이 경기를 이길 것이라는 그리스 고전주의는 '이긴 사람'이 잘 난 것 아니냐는 로마적 사실주의의 도전에 부딪쳤다. 이 후 인류의 역사는 감성과 이성이 서로 '실용성'의 이름을 차지하고자 벌이는 경쟁 가운데서 씌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에서 '현실'의 인식은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의 두 축이 교차하는 평면좌표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이들은 아직 독립변수들 간 위치설정의 갈등에 머무는 일임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오류를 생성한다. 이 좌표평면이 삼차원적인 성장을 통해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축이 바로 인생이란 종속변수이다. 즉 이성과 감성이란 두 생산 요소를 투입함으로써 인생이란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이 삶인 것이다. 이 때 이 함수가 증가함수인지 감소함수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란 용어의 인문학적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이 논점의 핵심으로부터 비켜선 위치에서 좌표를 구하는 근본적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의 이성과 감성이 서로 다른 축이 아닌 하나의 축으로 수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정책도 잘못 인지된 ‘현실’을 바탕으로 감성적인 ‘현실성’을 얻게 되면 이는 이성적 ‘현실’로 아무 절차도 없이 변환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영어문법이란 이름이 붙은 공부는 이미 ‘영어’의 문법과는 상관이 없는 어떤 것임이 세기를 거쳐 증명되었다. 이를 열심히 할수록 회화는커녕 영작이나 영문독해로부터도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교교육에서 이를 중시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이 오류를 공부의 내용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현실인가? 영어는 아무리해도 안 되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인식과 그러니 영어는 점수만으로 평가하자라는 패배자적 의식을 바탕으로 시험문제만 풀게 하는 것이 현실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의미 없는 조작된 ‘현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인가?
  교육에서 '현실'이란 말은 이성적 객관성과 감성적 사실성 모두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 공간에서 이들은 독립변수의 위치를 고고하게 차지한다.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영역이 논리적일 수록 인생을 생성하는 생산함수는 증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교육개혁은 그 실질성을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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