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동양일보 편집국장 겸 상무이사)

▲ 김영이(동양일보 편집국장 겸 상무이사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된 작년 9월28일 낮 12시쯤, 서울 지역 한 대학생이 “학교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줬다”며 112에 신고했다. 김영란법 관련 첫 위반신고였다. 
이 학생은 학교와 이름 등 구체적 정보를 밝히지 않아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 한통의 전화는 김영란법이 몰고 올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우리사회의 살얼음판 모습, 그 단면이었다. 캔커피도 마음놓고 한잔 얻어 마실 수 없는 세상.
김영란법 시행으로 농·수·축산업계와 외식업계가 타격을 입어 아우성이지만 더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지는 불신이다.
며칠 전 광주지역 한 호텔직원이 김영란법 위반이라며 신고한 예가 이를 웅변해 준다. 이 호텔직원은 ‘공무원이 광주 모 호텔 식당에서 수십명을 접대했다’고 고발장을 접수했다.
조사 결과 광주광역시가 주관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으며 식사비용도 현행법 범위를 넘지 않아 이 역시 없던 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고발자가 다름 아닌 해당 호텔직원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쯤되면 호텔이나 식당, 술집에서 종업원 눈치보며 술밥을 먹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픈 뿐이다.
한 공무원은 “종업원들이 작심하고 고객들의 김영란법 위반을 들춰낸다면 이를 피해나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이젠 업소에 가서 신분을 속이든지, 아예 발걸음을 끊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푸념했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공직사회는 몸사리기가 여전하다. 심지어는 민원인 기피현상으로 이어져 오히려 민원을 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볼멘소리도 적지 않다.
관공서 주변 식당이 파리 날리는 것은 오래됐다. 물론 이 법 시행으로 우리사회가 깨끗해지리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내수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미미하고 오히려 부정부패를 줄여 경제활성화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장기간 불경기에 시달려온 국민들로선 김영란법이 분명 경제위축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올들어 하락한 국내 쇠고기 자급률이 말해준다. 농협은 올 1~5월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5% 증가했다고 관세청 자료를 인용해 밝혔다. 반면 올 상반기 한우 도축 물량은 35만7774두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6만4927두에 비해 2% 감소했다. 미국산을 비롯한 수입산 쇠고기 물량은 늘어난 반면 한우의 물량은 감소한 것으로, 이는 김영란법 영향이 크다는 게 축산업계의 분석이다.
이런 기류를 반영해 정부는 김영란법 3·5·10 기준을 바꾸기로 했다.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을 10·5·3이나 5·10·10+5(화훼)로 하든지, 아니면 농축산물을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을 따지지 않고 공직자의 금품 수수를 처벌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있다. ‘스폰서 검사’나 ‘벤츠 여검사’ 사건처럼 대가성이 없다고 무죄판결해 국민적 공분을 사게 할 일을 막겠다는 것이다.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을 입증하는 것은 사법기관이 할 일이다. 형법상 뇌물죄를 적용하는 것은 수사권을 가진 그들의 몫이다. 그런데 그들이 밝혀내지 못해 국민적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전 공직자에게 직무관련이라는 굴레를 씌워 캔커피 한잔도 못 마시게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영란법은 금과옥조가 아니다. 일각에서 시행 1년도 안돼 개정하려는 것은 법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여론도 있다. 하지만 법이라는 게 다 사람을 위해 있는 거고 일상 통제를 위한 것이라면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것은 마땅하다. 
정부와 관련 업계에서 주장하는 법 개정도 그렇다. 가액기준을 상향조정해도 족쇄인 직무관련성을 그대로 둔다면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겨우 몇 천원하는 캔커피를 갖고 법에 어긋나네, 마네하는 것은 김영란법이 규정한 직무관련성 때문이다. 이 규정을 둔 채 3·5·10을 제아무리 상향해도 공직자들은 위축되고 재수없으면 다 걸리게 돼 있다. 굳이 법 개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따라서 김영란법을 개정한다면 직무관련성 삭제가 전제돼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그런 후에 가액기준을 조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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