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를 구분하는 이른바 ‘세대론’은 양 세대 간의 차이를 가늠하기 위한 나름 유용한 분석 틀이다. 대게, 어른들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지 간에 시대와 조우했던 자신의 경험치를 실증으로 복기하며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체험이 주관화되고 이에 몰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경험으로서의 일상적 확신은 사실 여간해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이해하기도 넘어서기도 힘겹다. 동일한 현상을 두고서도 기성세대는 ‘교훈’이라 말하고 청년들은 이를 ‘꼰대’의 시각으로 폄하한다. 기성세대는 어제를 이야기하고, 청년은 내일을 이야기한다. 그러하기에 지난 글에서도 말해왔지만 이러한 ‘세대론’을 도입하여 청년고용의 실타래를 풀어내기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세대 간의 간격을 사람을 중심에 둔 인문학적 관찰로 보기보다는 경제지표와 통계치로 건조하게 관조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 더, 세대론은 정치논리로서의 또 다른 편 가르기와 진영론으로 몰염치하게 차용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청년고용문제에 있어서는 ‘시대론’에 입각한 분석 틀이 덜 정치적이며 인문스럽고 유용하다. 어른과 청년의 간격이 있다면 그것의 본질은 ‘세대 차이’가 아닌 ‘시대 차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청년층은 지난 대선에서 75세 나이의 버니 샌더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현상은 세대론의 본질이 우리가 알고 있던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변화 욕구’였음을 입증한다. 샌더스는 여타의 후보들과 달리 이익단체나 거액 기부자에 의존하지 않고 800만 회에 걸쳐 개인 선거 기부금을 제공받았다. 1인당 평균 기부금은 27달러였고 250만 명이 기부금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에서 참여정치의 반듯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는 소액기부가 대부분인 것이다. 기부자의 대부분은 청년들과 서민들이었다. 샌더스의 경우처럼 청년세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때론 모진 ‘나이’의 권위를 내려놓고 ‘시대 변화’에 대한 완숙한 기성세대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내공을 발휘해야 한다. 그 시작은 청년세대의 변화 욕구에 대한 ‘공감’이다.
  
‘동정 피로’란 고통이 현재진행형인 이들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동정심이 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청년실업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한 지도 십여 년이 흘러서인지 우리 사회에는 만연된 청년실업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동정 피로’가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고질적 고용문제가 나아질 리 없다. 만연된 피로는 사회적 공감을 약화시킬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청년층 체감 실업률이 6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취업 준비생, 구직단념자 등을 포괄하는 청년고용보조지표는 23.4%로 전년 동월 대비 1.8% 포인트 상승했다. 지표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천신만고 끝에 통과된 일자리 추경이 청년고용 시장에 어느 정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그러나 공공부분 일자리로 정부가 나서서 마중물을 붓는다 한들 결국 일자리는 민간의 몫이다. 기업들의 청년고용에 대한 책임적 공감 없이는 동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적비용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도 일자리 창출은 국가복지의 핵심가치가 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자리 복지에 대한 전제는 다시 ‘공감’이다. 청년의 일자리 문제에 대한 나른해진 사회적 ‘동정 피로’를 떨쳐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 시민의 감성 의무다. 일자리가 없어 신음하는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편해야한다. 마음의 평화는 양심에 따라 살아야 얻을 수 있다. 양심은 우리에게 일상적 ‘공감’을 요구한다. 그 ‘공감’의 시작은 일자리에 갈망하는 청년의 눈물이다.

정규직 중심의 제조업이 쇠퇴하는 시대에 살며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노동의 색맹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고용 변화는 가늠하기 어려우며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에 따른 성장은 줄 곳 분배라는 뫼비우스의 대립전선을 야기했지만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사회 공동체가 회복되는 노력을 경주하면 산업구조의 변화는 순기능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고용 창출의 텃밭을 담당해야 될 우리의 노동시장 변혁은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도 여전히 지난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해소와 원·하청 간 부당한 기업 구조 개선은 해 질 녘 첩첩산중이다. 대기업 정규직의 고용이 인간의 체온 없이 삭막하게 강고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난망하다는 것이 확인된 고용 양극화의 법칙이다. 기득권을 지닌 이 땅의 사람들이 약자의 시련 앞에 ‘공감’을 가져야 될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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