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친 영역은 인류의 진화를 극단적으로 가속화한 시기였다. 그 이전까지는 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없는 분야까지도 합리주의의 후예들이 이성의 잣대를 들이 댄 결과였다. 예술부분에서의 발전으로 끌어올려진 인간의 분석력이 철학과 과학으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인간의 무의식이 그저 아무 것도 포함할 수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의 세계처럼 실체를 가진 그 무엇이라는 분석역시 이때에 탄생한 개념이다. 정신분석분야에서 이 역사적 의무를 담당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와 칼 융(Carl Jung)이었다. 프로이트는 기준점을 중심으로 '무의식'은 '의식'의 반대편에서 존재의 크기를 갖는 실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때 무의식이란 영역은 의식영역에서의 억압(repression)에 의해 생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무의식에서의 인식작용은 또 다시 의식영역에서 실체적 모습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다시 무의식을 형성하는 '억압'이 된다. 이때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은 현재의 잠재적인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기법이다.

칼 융은 '컴플렉스(Complex)'라는 용어를 탄생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억압'이론을 증명했다. 한 편으로 그는 '집단적 무의식'이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고리가 개인적 경험이나 유전적 요인에 뿌리를 둔 '억압'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설파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가 속한 사회는 그 종류를 불문하고 한 사람의 무의식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의식작용일 뿐임에도 사회집단에 따라 금기시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그 사회 구성원의 무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가 되었든 칼 융이 되었든 보통 세상살이에 바쁜 국가 구성원들 모두에게 무의식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시간과 능력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차마 무의식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가능성마저도 그리 크지는 않다. 그러나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놓고 보면 일반 대중의 존재가치가 무의식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보다 하등 낮아질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교육과 교육개혁의 문제가 생긴다. 어느 창조적인 과학자가 달나라를 왕복할 수 있는 관광로켓을 발명했다면 그것으로 사회구성원이 이익을 누리는 것은 분명 진화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과학자가 이를 담당할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를 누리기만 할 뿐 이러한 일에는 관심을 갖지 말자라는 생각이 이로 인해 파생된다면 이는 오히려 인류의 퇴화로 작용할 것이다. 교육의 개념과 그 실행방법이 집단적 무의식과 연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개혁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간단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일반적인 교실에서 늘 일어나는 상황을 먼저 정하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해 본 것이다. 그 중 하나의 항목은 학생이 현재의 수업진행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그가 교실 내에서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범위였다. 학교 교사들을 포함한 일반 성인들의 의식은 상당히 고전적 성향을 띤다. 어차피 수업을 듣지도 않고 집중할 수도 없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그는 수업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본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그 수업과 관계없는 소설책이나 다른 것을 볼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 다수의 판단이었다. 수업시간에 돌아다닌다거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행위도 바람직한 행위의 범위에 들지 못했다. 이러한 작위적 행위뿐만 아니라 쉰다든지 잠을 자는 부작위적 행위도 고려할만한 크기의 긍정성을 얻지 못했다.

우리나라 성인들은 대부분 학교수업의 참여형태에 관한 한 보수적 의견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자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유보되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정당성은 다분히 무의식적이다. 이유는 '학생이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무의식을 정당화한 의식이 사회적 동의를 얻고 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 설정이 오직 형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수업시간 사이의 '노는 시간'에는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은 의자라는 좁은 공간에 설 수도 누울 수도 없이 모든 자유가 유보된 채 앉아있는 것만 허락된 상태에 묶여야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아무리 무능해지고 학문으로부터 멀어지고 아무리 수업의 실질적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집단적 무의식의 우선적 지위가 모든 교육적 효율성뿐만 아니라 인격적 성장의 가능성마저도 빼앗는 현실을 용인하게 한다.

교육개혁은 형식적 제도의 개혁이 아니다. 학문, 인격, 철학, 인생관,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추상명사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도 추상적 가치를 가질 때만 '존재가치'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 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 영역에 '의식'영역을 형식적인 방법을 통해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주어질 경우 이는 그 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때 그 무의식이 용인하는 의식이 학문과 인격의 반대방향일 때는 생의 가치를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구성원들을 양성하며 동시에 그 역사의 손실을 시대화 한다. 교육개혁의 방향이 사고(思考)의 시대적 성격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교육지식인들이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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