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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고령화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다산 정약용의 노년 풍경
동양포럼/고령화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다산 정약용의 노년 풍경
  • 박장미
  • 승인 2018.07.22 2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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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련(충북대 강사)
김혜련(충북대 강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10~1570) 및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등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다산이 남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관한 경학(經學) 관련 저술과 일표이서(一表二書)로 널리 알려진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의 경세학(經世學) 관련 저술, 그리고 역사·지리·문학·과학·공학·의학·천문학·음악 등의 다양한 분야에 이르는 저술이 수록돼 있다.

다산은 학문을 연구하던 수학기(修學期)와 벼슬을 하던 사환기(仕宦期)에 남긴 저술보다 유배기 동안 저술 작업에 집중하여 대단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며, 해배 후 생을 마칠 때까지의 정리기(整理期)에도 연구와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억울하게 18년의 유배생활을 했으나 좌절하지 않았고, 벼슬길을 차단당한 그 시기에 오히려 “이제야 겨를을 얻었다”고 말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 그가 유배지에서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는 부모님을 섬기는 법과 어른들을 모시는 법, 형제나 친구들과 지내는 법, 그리고 학문에 대한 권고 등이 담겨 있으며, 결혼하는 딸을 위해 유배지에서 보낸 그림과 시에는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다산은 노년에 이르기도 전에 누구보다 많은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유배지에서 어린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고 한없이 목메어 울었고, 흑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귀양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둘째 형의 죽음에 통곡하며 그리워했다. 또한 병들거나 굶어서 죽어 가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에 삶의 의욕마저 상실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낯선 땅에서 고단한 시골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었고 그들에게 학문은 가르쳤다. 그리고 백성들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하던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는 그가 남긴 저술 속에 고스란히 남아서 그의 인간다운 면모를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다산의 노년기는 해배 이후의 시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시기는 다음의 여서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 먼저 다산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지속하고자 했다. 1818년(순조 18년) 8월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해배 명령이 내려지던 때, 다산의 나이는 57세였다. 그해 봄에 그가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한 점을 보면 그의 애민사상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목민심서’는 주권재민(主權在民)과 위민(爲民)의 철학으로 점철된 고전이다. 다산이 “심서(心書)”라고 한 까닭은 목민(牧民)할 마음은 있으나 그가 정치현실로부터 소외돼 있어서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이다.

‘목민심서’의 내용은 부임(赴任)·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의 관리로서 수령이 임명을 받은 이후로 벼슬을 떠날 때까지 행해야 될 일들에 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부임시의 행장이나 실무처리, 단정한 몸가짐과 청렴한 마음가짐, 교화, 공문서 작성, 세금 징수와 납부, 아전 단속, 토지 행정, 부역, 권농, 제사, 교육, 병무, 송사, 산림행정과 수리사업, 흉년 구제와 벼슬의 교체에 관한 일들이 그 내용이다.

이 가운데 4편 ‘애민(愛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민편은 노인을 봉양하며 어린이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상(喪)을 당한 이를 보살피고 병든 이를 돌보며 재난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애민편에서는 양로(養老)를 가장 첫 번째 조목으로 밝히고 있는데, 양로의 예를 통해 백성들의 효심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또한 양로의 예를 통해 노인들에게 반드시 좋은 말씀을 구하라고 했는데 이는 백성의 괴로움과 질병을 물어서 예에 맞도록 하라는 뜻이다. 대접을 받은 나이든 이들은 목민관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으므로 목민관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 지역민의 애환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이기에 다산은 양로를 권장한 것이다.

둘째, 다산은 노년기까지 실천을 중시하는 삶을 살아간다. 다산이 양로를 통해 효도의 예를 진작시키려는 것도 그의 실천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에 따르면 사람의 성(性)은 선(善)을 좋아한다. 마치 배추의 성은 오줌을 좋아하고, 마늘의 성은 닭똥을 좋아하며, 벼의 성은 물을 좋아하고, 기장의 성은 건조함을 좋아함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성에 대한 이론을 ‘성기호설(性嗜好說)’이라고 하는데, 이는 맹자의 성선설을 빌려 밝힌 것이다.

사람의 본심은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데, 오늘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를 하고 내일 또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를 하여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아래로 사람에게 수치스러워 겉으로 숨기고 가책을 느끼면 머리가 수그러들고 눈동자가 흐릿해져서 몸의 정기가 막혀서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효(孝)·제(弟)·자(慈)를 통해 인(仁)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주자가 송대 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유학의 본령인 윤리학을 지키면서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아우르는 새롭고 혁신적인 대안을 성리학을 통해 마련했지만, 다산은 주자의 리(理)가 ‘실체’(自由之物)가 아니라 존재의 ‘속성’(依附之品)이라고 했다. 또한 다산은 ‘효경(孝經)’에서 “부자(父子)의 도는 천성(天性)이다”라고 한 것과 ‘맹자(孟子)’에서 “형체와 용모는 천성이다”라고 한 것이 모두 기호(嗜好)를 성(性)으로 말하는 예라고 보았다. 이러한 다산의 성(性) 개념에 대한 고증학적 접근은 당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나뉘어 이념화된 성리학의 성 개념에 대한 접근을 근본적으로 재고함으로써 효(孝)·제(弟)·자(慈)의 실천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셋째, 다산은 노년기에도 나이나 당색, 학문적 계파를 넘어선 열린 마음으로 학자들과 교유했다. 문산 이재의(文山 李載毅, 1772~1839)와의 교유가 대표적인 예이다. 문산은 다산보다 10살 연하이며 노론 가문의 선비였고, 다산은 유배형에 처해 있는 남인이었다. 다산의 유배기(1801~1818)에 문산은 강진으로 다산을 찾아왔고, 그 시기 다산은 주자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맹자요의(孟子要義)’ 저술을 마칠 무렵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은 인성론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문산은 사단(四端)이나 성(性)의 개념에 있어서 당시의 해석을 따르는 입장이었고, 다산은 천명(天命)으로 부여받은 본성으로서의 선(善)을 실현하려는 개인의 자주권과 실천력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또한 다산은 문산과의 인연으로 인해 문산의 아들인 영암군수 이종영(李鍾英)에게도 글을 보내어 관리의 자세에 대하여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다산은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온 1818년 이후에도 문산 뿐만 아니라 수도권에 살던 김매순(金邁淳), 신작(申綽) 등 당시 중앙학계 학자들과 활발하게 교유했다.

넷째 다산은 노년기에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존중사상을 천명했다. ‘흠흠신서’는 1819년에 30권으로 완성되었는데, 부당한 죽음과 억울함이 없는 형정을 위하여 저술한 조선시대의 인명사건 판례집이다. 본래는 ‘명청록(明淸錄)’이었으나 후에 ‘서경’의 “흠재흠재(欽哉欽哉)”, 즉 형벌을 신중하게 하라는 구절을 따라 ‘흠흠신서’로 이름을 고친 것이다.

이 작품은 유학자로서의 다산이 제시한 유교적 성격의 재판 원칙과 규범을 밝힌 ‘경사요의(經史要義)’, 중국의 모범적인 판결문과 사건 보고서를 소개한 ‘비상준초(批詳雋抄)’, 법이 잘못 적용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한 ‘의율차례(擬律差例)’, 형벌을 신중하게 내리기 위해 덧붙이는 논의로서 정조(正祖)의 어판(御判)과 다산의 비평을 담은 ‘상형추의(祥刑追義)’, 관리로 재직할 때 다산이 경험한 사건을 소개한 ‘전발무사(剪跋蕪詞)’로 구성돼 있다.

‘흠흠신서’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관리의 흠휼(欽恤)과 애경(哀敬)의 자세는 다산이 백성의 인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긴 예이다. 다산이 ‘서경’과 ‘주례’를 인용하며 판관의 흠휼을 강조한 것은 유교적 사법체계에서 범죄성립과 재판을 결정하는 것이 범죄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자의 고의성 여부에 있었고, 그런 심리상태와 심증(心證)을 밝히기 위해서는 판관의 신중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다산은 과오인지 고의인지 여부가 살옥(殺獄)을 다루는 큰 원칙이라고 말한다. 과오살(過誤殺) 여부와 심증(心證)을 중시했던 것은 유교적 형법과 형벌이 지향한 최종가치가 윤리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교사회의 강상윤리는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노주(奴主) 간의 명분을 기반으로 하며, 법으로 단죄하는 행위란 것은 결국 예와 명분이 지향하는 위계질서를 거스른 행위를 말한다. 당시 유학자들이 명분을 내세운 밑바탕에는 도덕적 우월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산이 유학자로서 추구했던 이상도 결국 도덕성에 기반한 정당한 차별과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백성의 생명을 존중하여 판결하고자 하는 면과 더불어 ‘흠흠신서’의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이 ‘흠흠신서’를 저술하면서 판결에 있어서 신중하고 또 신중을 기하라고 당부한 것은 그의 유배경험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의 천주교 탄압은 종교적 명분을 앞세워서 남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계략이었다. 이에 다산은 ‘흠흠신서’를 통해 치자의 잘못된 판결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사형 제도를 악용하여 생명을 함부로 대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섯 째, 다산은 해배 이후에도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자적 자세를 견지했다. 다산은 유배시절(1801~1818) 동안 육경(六經) 사서(四書)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는 경학 작업을 완료했고, 이를 토대로 하여 1818년 가을 직전까지 경세학적 저작 활동을 했는데, 국가의 경제· 사회· 정치 개혁론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지방관의 역할과 지방 정 운영 개선안인 ‘목민심서(牧民心書)’가 그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해배 이후 서거 직전까지도 그의 저작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주로 강진 시절의 저작을 수정 보완하여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경학 관련 저술로는 동아시아 역학사를 정리한 ‘역학서언(易學緖言)’과 국학 관련 저술로는 ‘이담속찬(耳談續簒)’과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가 있다. ‘아언각비’는 1819년 겨울에 3권으로 완성했는데, 다산의 언어학 관련 저술이며 다산학의 절정기에 그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200여 항목을 서술한 것이다. 또한 ‘산수심원기(山水尋源記)’나 ‘산행일기(汕行日記)’, ‘천진소요집(天眞逍遙集)’을 저술했고,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증보했다.

만년에는 ‘상서(尙書)’ 관련 저작들을 개정했는데, 강진 시기의 초고본 ‘매씨서평’을 개수했고, 유배기의 초고본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합편하여 ‘상서고훈’을 개정 증보했으며, ‘매씨서평(속)’과 ‘상서고훈서례’를 편찬했다. 다산이 ‘상서’ 원문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규장각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선발된 1789년(정조 13) 이후였다. 정조가 주도하던 ‘상서’ 강의에 참여하던 도중 부친의 상을 당했고, 삼년상을 치르느라 강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시기에 ‘상서’를 깊이 고찰하면서 고문상서와 금문상서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다. ‘상서(尙書)’는 공자가 중국의 요순시대부터 주나라까지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수집해서 편찬한 책인데, 다산이 이를 해배 이후에도 중시한 것에서 그가 말년까지 새로운 국가체제를 열망했음을 알 수 있다.

여섯 째, 노년의 다산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다산은 1822년(순조 22년)에 61세의 나이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으며, 해배 이후에 윤서유, 윤참의, 권철신, 이가환, 정약전 등의 묘지명도 지었다. 그의 ‘자찬묘지명’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였다. 자찬묘지명을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저술에 대한 체계와 요지를 설명하고 유명을 남김으로써 그는 깨닫지 못한 사이에 죽어가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고, 죽음을 자각하는 사람으로서 본질적 고독을 체험하면서도 담담하게 죽음을 대면할 채비를 했을 것이다.

다산은 그의 나이 75세에 회혼일(回婚日)을 맞이하여 친족과 제자들이 모인 고향 마재에서 생을 마쳤으며, 장례 절차는 ‘유명(遺命)’ 과 ‘상의절요’를 따라 진행되었다. 그의 유명대로 여유당 뒤편 광주(廣州) 초부방(草阜坊) 마현리(馬峴里) 정남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냄으로써 한 생을 마감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고향에서 평화롭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렸다. ‘예기’ 단궁상편(檀弓上編)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으로, 근본(根本)을 잊지 않으며, 죽어서라도 고향(故鄕)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강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영구(營丘)에 봉해져 계속해서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주(周)나라에 와서 장례(葬禮)를 치렀다는 것이며, ‘여우가 죽을 때 언덕에 머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인(仁)이다.’라고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바쁜 일상 속에서 죽음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 순간은 홀로 맞이할 수밖에 없고, 죽어가는 과정도 외로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기에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은 준비하는 자만이 존엄하게 맞이할 수 있는 종착지이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고자 한다면 ‘사전 의료 의향서’를 써 놓고,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처럼 유언장을 써보는 것도 죽음을 품위 있게 준비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임종직전이 아니더라도 남길 말을 미리 해두는 것, 자신의 영혼과 몸, 재산처분에 대한 개인적 소망이나 의지를 유언을 통해 표현해두는 일은 죽음에 이르러야할 인간의 운명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산의 노년은 참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그는 마지막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가진 유학자로 살면서, 백성에 대한 사랑과 공직자의 윤리관을 ‘목민심서’를 통해 드러내었으며, 실천성의 강조를 통해 인(仁)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인(仁)을 두 사람이라고 했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행사(行事)’를 통해 실천할 때에만 성립된다고 했다. 그리고 다산은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이나 당색, 계파에 구애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견지했으며,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인식하여 판결에 있어서 한 없이 신중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학문의 완성을 위한 열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웠다. 그는 당대 서학, 고대유학, 훈고학, 양명학, 고증학, 일본고학, 그리고 주자학적 요소를 포함한 당대 주요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숙고하여 종합했으며, 시대의 모순과 비리를 직시하여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보여주었다.

민본과 애민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한결 같은 일생을 보낸 다산의 삶은 공익을 생각하고 인간의 윤리적 실천을 중시하여 원시 유가사상의 근본정신을 회복하고 있다. 해배 이후 서거할 때까지 그가 보여준 행보는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

또한 통일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남과 북의 철학계가 함께 민족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추앙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민족주의적 관점 속에서 철학적 동질감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며, 윤리학적 측면에서도 새롭게 조명해야 할 우리의 자랑스러운 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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