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사찰 비밀을 따라, 미륵산성 굴곡진 역사를 따라 걷는 해탈의 길

미륵산성을 보며 질기고 고단한 삶이 끼쳐온다.
공림사 뒤에 낙영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푸른 산에 소나무가 없으면 푸른 산이 아니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큰 강을 만들 듯이 소나무가 있어야 산이 되고 숲이 된다. 올 여름은 왜 이리 뜨겁고 질긴지, 밤마다 외로움은 헛헛하고 느린지, 그래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데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골이 되고 숲이 되고 큰 하늘, 큰 강물이 되었다.

소나무의 옹이진 아픔, 붉게 빛나는 슬픔과 용기, 이 모든 것을 딛고 진한 향기 푸른산을 지켜왔듯이 이제는 내가 네 곁으로 가야겠다. 한 그루의 소나무, 끝끝내 푸른 산이 되고 푸른 기상이 되어야겠다. 그 맹서를 가슴에 품고 공림사로 향했다.

공림사의 대웅전은 단청이 으뜸이다.
공림사의 대웅전은 단청이 으뜸이다.

공림사는 신라 경문왕 때 자정선사가 창건했다. 경문왕은 자정선사의 법력을 인정해 국사의 칭호를 주었지만 자정은 국사의 지위를 사양하고 초암을 짓고 살았으며, 선사의 덕을 추모한 경문왕이 절을 세우고 공림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전해져 온다. 조선 중기에는 법주사보다 더 융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대웅전만 남고 모두 소실됐으며 인조 때 다시 중창됐지만 6․25전쟁 당시 공비들이 절에 출몰한다는 이유로 토벌군에 의해 영하문과 사적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됐다. 1960년대에 극락전과 요사채 재건한 것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중건과 복원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바람 잘 날 없다. 슬픈 역사의 궤적을 돌고 돌아 온 것이다.

사찰이라고 모두 똑 같지 않다. 사찰의 역사와 내력과 가람의 형태와 스님들의 도량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다르고 수련과 정진이 다르며 생명의 기운이 다르니 찾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이고,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이며,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僧寶)사찰이라고 한다.

공림사와 낙영산, 그리고 천년의 은행나무 풍경이다.
공림사와 낙영산, 그리고 천년의 은행나무 풍경이다.

팔만대장경에 ‘큰 산은 큰 덕’이라고 했다. 큰 산은 가볍게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고 곧은 자세로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 생명의 기운과 자연의 신비와 드높은 기상과 광활한 대자연의 큰 마음을 갖고 있다. 철철이 새로운 멋과 맛과 향기로움을 주고 있으니 자만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며 늘 푸른 마음이어야 한다. 공림사를 둘러싸고 있는 낙영산의 가르침이다.

낙영산은 소나무 숲과 바위산으로 유명하다. 산 이름처럼 하늘의 구름도, 울울창창한 소나무도, 세월의 이끼를 하얗게 뒤집어 쓴 바위도, 계곡물의 폭포도 모두 그림자가 되어 출렁이고 바스락거린다. 하여 숲 속을 오르는 사람도, 하산하는 사람도 모두 낙영산의 시원한 장관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기운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며 낙영산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바위와 소나무와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의 궁합이 이곳처럼 조화로운 곳도 드물 것이니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유롭고 그 마음은 곡진하다.

공림사의 천년된 느티나무는 보는 것만으로도 신묘하다.
공림사의 천년된 느티나무는 보는 것만으로도 신묘하다.

공림사에서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는 신령스럽다 못해 보는 이를 아찔하게 한다. 천년을 살고 있다니. 어쩌면 이 느티나무는 공림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과 세월과 생명의 이야기를 제다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위선인지, 누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왔는지를. 그렇지만 느티나무는 단 한 번도 세상 사람들에게 천기누설을 한 적이 없다. 가볍게 듣고 가볍게 내뱉는 우리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미륵산성을 보며 질기고 고단한 삶이 끼쳐온다.
미륵산성을 보며 질기고 고단한 삶이 끼쳐온다.

공림사 서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도명산이다. 해발 642m의 정상과 계곡을 아울러 돌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 있는데 이름하여 미륵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만 5㎞가 넘는다. 통일신라 말기인 9~10세기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천년의 풍상과 굴곡진 역사를 품고 있다. 고려시대 거란과 왜구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 등 전쟁 때마다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서 은거했다. 성곽 안에 깊은 골마다 집터가 있고 기와나 도자기 등의 파편과 절구와 숫돌 등 상처입은 삶의 흔적이 가득하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서일까. 역사의 현장에 서면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때론 울컥 눈물이 쏟아진다. 아름다움을 찾아, 그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가슴뛰는 일을 해야겠다.



글 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사진 송봉화 <사진작가, 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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