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信여성통합학문연구소·세종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지난 8월에 북경에서 열렸던 24회 세계철학자 대회의 주제어가 ‘학이성인’(學以成人)이었다. 즉 ‘공부와 배움을 통해서 참된 어른이 되자’는 것이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말에는 동아시아의 오랜 유교 전통이 잘 나타나 있다. 유교적 도는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학문과 배움의 길을 중시해 왔고, 그 지향의 최고 목표가 종종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만물일체’(萬物一體) 등의 큰 영성적 언어로도 표현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주변의 삶을 둘러보면 이 이상의 실현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것을 볼 수 있다. 학문의 발전은 과거 여느 때보다도 크게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멀어진 것 같고, 한국사회도 얼마 전부터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고 할 만큼 노년과 노인 구성원이 크게 늘었지만 ‘성숙한’, 또는 ‘멋진’ 노인들이 드물다고 말한다. 한국사회에는 특히 멋진 ‘남성’ 노인이 드물다고 여성들은 자주 불만스럽게 말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노년이 되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배움이란 단지 젊은 시절에, 아니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만 하는 것으로 여겨서 그리 된 것일까? 또는 지난 근대의 시간 동안에 우리의 공부란 단지 외적인 지적 정보들을 외우는 일로만 채워졌고, 그 이전 아시아의 오랜 전통인 인격적으로 ‘큰 사람’(大人), ‘위대한 사람’(聖人)이 되는 일은 진작 잊혔기 때문인가? 아니면 20세기에 들어와서 직업과 가사의 일이 더욱 양분되고, 집밖의 일과 집안의 삶이 극적으로 분리되면서 온통 돈 버는 일과 노동에만 몰두해온 남성들이 통합적으로 삶을 살아오지 못한 결과로 노년이 되어서 마치 ‘젖은 낙엽’처럼 추루한 모습이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모든 물음이 모두 긍정될 수 있다고 여긴다. 지난 근대의 삶 동안에 인간의 지적 능력과 지성은 크게 신장하였고 학교 교육은 만연하게 되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철저히 개인과 자아의 외적 성장과 미래적 부함만을 위해서 추구되었다. 그래서 정작 그 과거적 알고리즘을 축적하고 지식의 탄생을 위해서 고생해온 부모적 세대의 삶은 무시되고 현재 세대의 잘됨과 미래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었다. 거기서 핵가족 형태로까지 환원된 가족 공동체는 무너지고, 공공의 영역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 세대가 그렇게 몰두하는 미래의 시간이 더 잘 보장되고 기대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요즈음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그 반대 현상으로 이미 오래 전에 맹자도 잘 예견한 것처럼 가족적 삶이 의미를 잃는 ‘무부’(無父母)와 공공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무군’(無君)의 시대가 불러오는 비인간화가 심해져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폐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맹자는 그래서 우리의 몸적 기원과 가까운 삶의 반경을 소중히 여기는 ‘친친’(親親)을 강조했고, 오래되고 근원이 되는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경장’(警長)을 말했으며, 그것을 ‘인간됨’(仁)과 ‘정의’(義)의 모습으로 규정하면서 그 길이 ‘인간의 길’(人路)임을 밝혀주었다. 주로 현재의 시간에만 집중하여 공정(fairness)을 따지는 서구적 정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고, 과거의 시간에 대한 공정함을 먼저 지키고, 미래의 시간에도 생과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마땅한 보살핌과 배려를 주는 동아시아적 義가 훨씬 통합적이고 통섭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이야기를 달리 밝혀보면 한 인간의 삶과 공동체적 삶에서 지성뿐 아니라 ‘인성’과 ‘영성’의 차원이 함께 중시되어야 함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남성 노년의 삶이 더 추루한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이 두 측면이 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관계를 맺고, 정감을 나누고, 일상뿐 아니라 보다 더 지속적인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과거의 토대에 대한 인정과 감사, 공공적인 가치와 정의에 대한 기여 대신에 오직 개인적 성취나 자기 핵가족의 자식들에만 몰두한 결과가 오늘 한국사회의 모습이라고 여긴다. 그런 부모 세대와 더불어 자라난 세대는 다시 그 부모 시간의 수고와 일에 대한 감사나 인정 대신에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토대도 없이 마치 졸부나 또는 거지처럼 또 다른 성취를 위해서 비인간적이고 비참하게 분투하며 살아가기 쉽다.

여기서 영성적인 차원에 대한 언급을 더 하고자 한다. 근대의 세속사회에서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아예 무시를 당하거나, 아니면 오늘 한국사회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자주 보듯이 영성이 지성과 인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거의 反지성의 모습으로 신비화된다. 나는 이 두 극단의 모습은 참된 영성이나 지성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 영성이거나 사이비 지성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사실 종종 영성이나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유교 전통의『논어』나『중용』도 일찍이 ‘더 높은 것’(上焉者)이나 ‘믿음’(信)과 관련해서 말하기를, ‘지(知)가 미친다 하여도 그것을 인(仁)으로 지킬 수 없으면 반드시 잃고 말 것이며, 인(仁)이 지켜지더라도 마침내 그것을 예(禮)로 하지 않으면 잘한 일이 아니다(논어 위령공 32)’라고 했거나, ‘높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중용 29장)’라고 지적했다. 나는 이러한 언급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세 차원을 동시에 밝히면서 그 통섭을 역설한 것이라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영성이란 이렇게 지성과 인성, 영성이 잘 통합되어서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 인간 삶의 궁극적 지향과 목표도 바로 그러한 차원의 도달(聖〮․性/神․信)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 우리 삶이 모두 물질적 쾌락과 부의 추구에 경도되어 있고,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으로 여겨져서 시공간적으로 단차원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모든 것을 시장적 가격으로 매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노년의 삶은 괴로운 것이고, 몸의 쇠약은 불행이며, 全 문화와 생이 온통 성애화(sexualization)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각종 성범죄가 그 모습이고, 노년의 삶도 그렇고, 어린 유아의 시간까지도 유사한 성적 이야기와 소원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오늘 인간의 삶이 어느 정도로 물질과 이 세상적 차원으로 환원되었는지를 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존재적 근거와 조건이 있고,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거나 상상하지 못한다. 나는 특히 노년의 삶이야말로 이렇게 믿고, 생각하고, 예측하는 판단과 상상, 사고의 능력이 더욱 고양된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고양된 사고의 능력이란 단순히 여기․지금의 감각과만 관계하는 지능이나 지식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종종 ‘지혜’나 ‘靈’, ‘神’으로 지시하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 정신의 일을 말하고, 그것은 지혜의 ‘지’(智)자가 보통의 ‘지’(知)에 날 ‘일’(日)자가 더해져서 지어진 것처럼 오랜 동안의 구체적인 삶에서의 실행과 실천, 판단을 내리고, 삶을 이어가고, 뜻을 전하기 위해서 고통해온 시간들과 씨름들이 쌓여서 얻어진 결과라고 하겠다. 그래서 ‘지혜’와 ‘덕’(德)의 인식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삶에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보다 많이 붙여지는 형용사가 ‘덕스럽다’거나 ‘지혜롭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의 지식과 의식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지난한 삶 속에서 더욱 더 그 구체적인 삶에서의 실행과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지시일 것이다. 나는 이 여성적인 덕과 지혜가 이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더욱 중시되고, 21세기의 오늘날에는 겉모습의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그 체화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 지혜로서 표현되고 덕으로 드러나는 인간 인식과 의식의 능력이야말로 지성에 인성과 영성을 더욱 통합하여서 만물을 살리고, 천지의 화육에 함께하는 참된 영성에 보다 더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天地生物之理/心). 그것이 또한 21세기 오늘날 남성들이 하루 속히 자신의 삶에서 더욱 체화해야 하는 가치이고, 이 여성적인 가치를 통합하고 실천하는 일 속에 남성 노년의 삶이 비루함을 벗고 고양되는 길이 있다고 여긴다.

그 길은 바로 참으로 하늘적이고, 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길과 지극히 땅적이고, 몸적이며, 형이하학적인 것을 자신의 일상과 사고와 삶에서 통섭하는 길이다.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불이적(不二的)인 동시성의 긴장과 신비를 살아내는 것이 참된 영성이며 인간 규정이라고 우리의 고전들은 한결같이 가르쳐준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항상 인간이었고, 동시에 항상 ‘포스트휴먼’이었다. 우리는 항상 개인이었지만 동시에 또한 언제나 그 이상으로 살았으며,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지혜와 겸손, 온유와 약속, 정직의 환희를 함께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everyday is a good day to live!’ 와 ‘everyday is a good day to die!’를 모두가 더불어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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