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 주 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 주 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머나먼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니 얼굴

그 누가 불어주는 하모니카냐 아리랑 멜로디에 한숨에 젖네 향수에 젖네’

어릴 적 동네에는 노래가 난무했다. 라디오도 변변히 나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

에 아이들이 마당마다 북적였다. 별 놀이가 없어서였을지 흥이 많아서였을지 모이면 이런저런 노래를 불러댔다. 어른 노래고 전쟁노래고 국경일 노래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은 누군가가 흥얼대기 시작하면 목청을 올려 함께 불러댔다.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는 길은 노래가 지천으로 흘렀다. 그러니 월남의 달밤 노래도 아이들이 불러대는 노래 속에 한 자리를 잘 차지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당사자가 아닌 우리 군대가 싸우러 간 정황을 담고 있는 노래이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런 내용이야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월남은 동네 청년들이 가서 C레이션 박스라던가 상자와 함께 돌아오던 어쩌면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그 때 촌아이들에게. 다리를 다쳐온 이도, 팔을 다친 이도, 돌아오지 못한 이도 아직 소문이 없던 그 동네에. ‘머나먼’이라는 말이 주는 거리감과 ‘섬의 나라’라는 이국적인 어감은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육지만 있는 동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와 섬은 동경할 만한 바가 있는 것이므로. 섬이 있는 나라,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섬이 많은 나라 무엇으로도 해석될 만한 그 섬의 나라는 어찌나 상상 속에서 그럴듯하던지. 아이들이 부를 만한 노래가 없었는지, 전쟁이 끝나고 난 이완 때문이었는지 동네에는 이런 종류의 노래들이 넘쳐났다. 그 무렵 언니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같은 노래들에 맞춰 고무줄 놀이를 하기도 했더랬다.

어느 날 엄마가 월남치마를 입었다. 월남에 다녀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그 의복도 함께 왔는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참 먼저 입고 난 뒤였을 것이다. 우리가 엄마도 입으라고 졸라댔던지 안된다던 엄마 응대가 떠오르는데, 그 전에 엄마는 한복을 입고 집안 일을 했을까 기억이 없다.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무명 저고리를 입고서,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 밑의 외며느리인 엄마가 촌 동네에서 새로운 장르의 옷을 앞장서서 입었을 리는 없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별 걸 다 졸라대기 일쑤였다. 동네 누구네 엄마는 밥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안하고 한 숨 씩 낮잠을 잔다더라고 엄마도 바로 설거지 하지 말고 밥상을 밀어놓고 자라고. 그러면 엄마는 안된다고 못한다고 우리 청을 거절했다. 그 때 밥상을 웃목에 밀어놓고 낮잠이라도 한 숨 잤다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엄청나게 그리웠을지 모른다. 뭔가를 하기 전에 누울 자리인지 앉을 때인지를 살피고 가늠해야 하는 어른 밑에서 살아가자면. 세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견디는 대상이 되는 게 맞는 걸까, 대체로. 치마 하나를 입자는 데도 어른의 의중을 미리 살피고 그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처지는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절이었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하리라.

어느 때 이후로 엄마도 월남치마를 입기 시작해서 한 때 드레스 비슷한 옷을 집에서 입고 있기도 했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 기점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으려나.

어느 시대는 옷 하나를 입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꾸지람을 각오해야 하는 극도로 규범화된 관습이 지배한다. 그럴진대 다른 중요한 부분에서야 일러 무삼할까. 세월이 흘러 바뀔 일에 목숨까지도 걸도록 하는 건 관습과 도덕의 폭력적 측면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인 것들을 빼고는 바뀌고 바뀌고 바뀔 것이다. 그게 문화고 문명이므로. 바뀌는 것이 다 좋다고 할 수 없듯 오래 된 것마다 다 좋다고 할 수는 없고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남는 법이려니 어쨌거나 팔순이 넘은 엄마는 월남치마를 거쳐 드레스 같은 옷을 지나 바지를 상용하지만 복장의 자유를 갖게 되자 건강과 몸 상태라는 복병과 대치해야 한다. 그러니

입성의 사소한 장르 변경쯤은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대도 암시랑토 않아야 하는 게 이제는 당연하다. 뒷 강물이 앞 강물을 밀어내니 미리 좀 순하게 풀어져서 흘러야하지 않으려나, 가을, 휘황하게 물드는 나뭇잎들까지 보면서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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