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바람처럼 '그냥' 살고싶은… 백남준이 인정한 유일한 후배작가

백남준과 휘트니미술관서 '2인전' 열기도… 공공미술로 국제적 주목받는 청주 출신 미술가

비빔밥·달항아리에 '한국혼' 담아… 김환기 화백 부인 김향안 여사는 그의 삶의 스승



“이름은 강익중, 호는 그냥입니다.”

그는 ‘그냥’을 좋아한다. 왜 시(詩)를 쓰는가 물어도 ‘그냥’이고 좌우명을 물어도 ‘그냥’이다.

그냥 나무처럼 살고 싶고, 그냥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속에 들어있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고 나면, 그가 얼마나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인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지 이해가 되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강익중(58)씨. 청주가 낳은, 아니 대한민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세계적인 미술가.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엔 (그가 한 일이 너무 많아서) 단어가 부족하다.

백남준이 인정한 유일한 후배작가이자, 이상의 부인이었으며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 여사가 마음으로 아꼈던 화가. 대형 공공미술로 국제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를 청주에서 만났다. 소년처럼 해맑은 동안(童顔)의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다. 달변이었다.


 

2018년 10월 청주에서 열린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 작품 앞에 선 강익중 작가.
2018년 10월 청주에서 열린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 작품 앞에 선 강익중 작가.

 

-이제서 만나네요. 1996년 조선일보미술관과 학고재 등에서 동시에 열린 귀국전시를 보고 ‘3인치 작가’ 기사를 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아, 그 전시. 유학을 떠난 지 12년 만에 보여드렸던 전시였지요.”

-새삼스럽지만 당시 얘길 잠깐 들려주신다면.

“1984년 홍익대 서양학과 졸업을 앞두고 뉴욕 프랫(Pratt) 아트인스티튜트로 유학을 떠났어요. 집안의 경제적 부침으로 유학생활은 어려웠어요. 주중엔 식품점에서, 주말엔 벼룩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고 경비를 서면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어요. 캔버스 살 돈은 물론 그림 그릴 시간도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캔버스를 가로·세로 3인치로 잘라 들고 다니면서 이동하는 차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지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의 추억, 영어단어 암기 등 떠오르는 것들을 기호나 문자, 그림으로 그렸어요. 때론 캔버스 위에 바느질도 하고, 볼펜으로 그리기도 했지요.”

-그래서 트레이드 마크인 ‘3인치 그림’이 나온 것이군요. 강익중 작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백남준 선생이거든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났는지요.

“백남준 선생님은 제 일생에서 잊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 김환기 화백님의 부인인 김향안 여사님이 계십니다. 두 분은 어느 날 갑자기 제게 오신 선물같은 분들입니다. 1994년 어느 날 전화가 한통 왔어요. 휘트니미술관이라면서 백남준 선생님과 저의 2인전을 기획했는데 의사가 있느냐는 거예요. 머뭇거리고 답을 못했더니 5분 만에 또 전화가 왔어요. 제가 거기가 어딘지 주소를 모른다고 하니까 기가 막힌지 ‘아니 휘트니 미술관을 몰라?’했어요. 제 핸디캡이 그거예요. 저는 저 외엔 신경을 안쓰거든요. 미대를 나왔지만 화가도 잘 모르고, 미술사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공동전시를 준비하는데, 백남준 선생님이 휘트니미술관 관장에게 팩스를 보내오셨대요. 강익중이 더 좋은 자리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이 분은 어떤 분일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전시 오프닝 날 백 선생님을 처음 뵈었어요. 물론 89년 첼시의 한 갤러리에서 뵌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리긴 처음이었지요. 그 뒤 백 선생님은 저를 만나면 ‘’한국에서 다시 2인전을 열자‘고 하셨어요. 결국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3년 후인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멀티플 다이얼로그(Multiple Dialogue ∞)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지만 선생님이 그립네요.”

-백남준의 ‘다다익선’과 강익중의 ‘삼라만상’이 만나는 ‘무한대 멀티플 다이얼로그(∞)’라는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전시였지요. 백남준을 향한 강익중의 오마주 전시라고도 했었지요.

“그 분은 다른 분들과 보는 눈이 다른 분입니다. 21세기에 사시는 분이 30세기 이야기를 하고, 낮에도 별을 보는 분이었지요. 바둑으로 치면 수를 두시는 분이 아니라 판 전체를 보시는 분이라고 할까요. 백 선생님과 더불어 제게 영향을 준 또 한분은 사모님(김향안 여사)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23년 전 사모님이 제 전시에 오시더니 ‘김환기 상’에 공모해보라고 하셨어요. 저는 안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따라가서 점심을 사드렸지요. 친해졌어요. 그 분은 문인으로 미술평론가로 화가의 부인으로 판단력과 혜안이 있는 분이셨어요. 제가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했을 땐 노구를 이끌고 오셨고,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자고 하셔서 모시고 여행을 가기도 했었지요. 사모님은 제게 ‘아침 꼭 먹어라, (건강해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 식당 팁 많이 줘라(일하는 사람들도 가정이 있다. 그들이 널 좋아한다), 기회와 운은 따라 다닌다(네가 잡으려 하지 않아도 너한테 온다)’시며 ‘네가 하는 일이 민족과 역사 세계에 옳은 지 판단해라, 미술가로서 올바른 행동과 가치를 잊지마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또 한 사람, 강익중 작가의 오늘 뒤엔 든든한 경제적 지원군인 부인 마가렛 여사도 있지 않나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는 홍대 ‘UFO클럽’에서 만났어요. 워싱턴주립대 3학년일때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만난 것이지요. 제가 미국으로 간지 1년 뒤인 1985년 12월에 결혼을 했어요. 장인어른을 뵙던 날, 어려워서 고개를 숙이고 밥만 세 그릇을 먹었더니, ‘밥 잘 먹는 게 믿음직스럽다’며 결혼허락을 해주셨어요. 그 사람도 원래는 미술 전공이었지만, 저와 만난 뒤 그림을 포기하고 로스쿨에 다녀 변호사가 되었어요. 지금은 부동산개발회사인 영우&어소시에이츠(YWA)의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요즘엔 항만 건설로 저보다 더 바쁩니다.”

-2년전 여름인가, 런던에 갔다가 템스강 위에 띄운 강 작가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테이트모던 미술관 앞으로 이어지던 작품에서 이산가족들의 얼굴과 염원을 보았는데요. 최근엔 이런 식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런던 전시를 보셨군요. 런던 최대 예술축제인 ‘토털리 템스’의 초청을 받아 강 위에 실향민들의 그림을 모아 설치작품을 띄웠던 것이지요. 저는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겪어봤어요. 성공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수단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봅니다. 소외와 고독으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인의 마음의 벽도 서로 털어놓음으로써 벽이 사라지고 하나가 된다고 봅니다. 저는 되도록 자신을 객관화하고 세상 사람들과 편견 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가운데 어린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좋아해요. 그래서 1999년부터 각종 단체, 병원, 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그림을 수집했어요. 그 그림들로 2001년 뉴욕 유엔 건물 로비에 9·11 테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엔아동특별총회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 ‘놀라운 세계’를 설치했고,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희망의 벽’을 설치하고 있어요. 2004년 미국 신시내티병원에 설치했고, 국내에도 충남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수원 장안구보건소, 고양의 명지병원 등에 설치했습니다. 또 전 세계 135개국 어린이들로부터 평화를 소망하는 그림을 모아 통일 염원을 담은 지름 12m 대형 풍선을 일산 호수공원에 띄웠어요. 전 세계 어린이의 꿈이 담긴 달이라는 뜻에서 ‘꿈의 달’이라 명명했었지요.

2005년에는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무하마드 알리센터 개관에 맞춰 141개국에서 모은 7000점의 작품과 사운드가 조합된 작품을 통해 종교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평화를 소망했고요, 또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 공립도서관 로비에 주민들이 내놓은 애장품과 소품들을 활용, ‘행복한 세상’을 만들었지요. 주민들이 내놓은 아인슈타인의 파이프, 노벨상·퓰리처상 수상자의 메모와, 2억년 된 돌과 장난감 등이 작품에 녹아들어 지역의 도서관에 영원히 남게 되었네요. 국내에서 기억되는 작품으로는 전남 순천만국가공원에 설치된 ‘현충정원’이 있군요.”

-최근 ‘달항아리’ 시집도 내셨는데, 지난해 말 광화문 복원공사 현장의 가림막에 ‘달항아리’를 중심으로 흑백의 서울 자연풍경 그림을 배치해 관심을 불러일으켰어요. 강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달항아리’는 어떤 의미인지요.

“달항아리는 한국 문화의 상징이지요. 한국인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처럼 그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을 수용하고 담아내는 듯 푸근하고 소담하게 보이지 않나요? 원래 달항아리를 제작하려면 상하 두 개로 나누어 만든 뒤 1500℃가 넘는 고온에서 하나가 돼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항아리가 마치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 같아서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저는 현대인들이 달항아리를 통해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으로부터 비켜서서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세계에 전시되는 작품 중에서 한글과 관련된 작품을 보면 자긍심이 생깁니다.

“아들 기호에게 한글을 가르치다가 한글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뒤 한글작업을 계속합니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 건물에 민태원의 시 '청춘예찬'을 적어 넣었고, 이라크의 자이툰 도서관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어린이들의 그림 한가운데에 한글로 '친구, 희망, 사랑, 평화' 라는 단어를 새겼어요. 또 2014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국제엑스포 한국관 외벽과 내벽에 한글을 도상(圖像)으로 한 작품을, 뉴욕에선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교수와 함께 ‘한글 아트북’을 제작했어요. 그런데 달항아리나 한글이 비슷한 것은 따로 만들어지는데 하나가 된다는 것이에요. 달항아리가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따로 만드는데 한 몸이 되는 것처럼 한글은 모음과 자음이 붙어서 한 소리를 내잖아요. 저는 이런 것들의 ‘연결자’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분단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신 것 같던데요.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닫힌 벽이 되지만, 사랑을 담으면 열리는 것이 벽이지요. 떠나 살다보면 조국의 분단이 가슴 아픕니다. 제 꿈은 전 세계 141개국 어린이들이 평화와 희망의 염원을 담아 그린 그림들을 모아 비무장지대를 흐르는 임진강 위에 남과 북을 연결하는 ‘꿈의 다리’를 놓는 것이지요. 언젠간 이 꿈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이런 질문 지금도 듣는지, 왜 화가가 되었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어요. 큰아버지가 제 그림을 보고 기뻐하시며 ‘조상님께 면이 선다, 넌 화가가 돼라’고 하셨어요. 그 조상님이 화가 강세황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화가의 길을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경기도미술관 작업을 할 때 한 꼬마아이가 제게 물었어요. 이런 일을 왜 하느냐고. 왜 할까? 생각해봤지요. 과학자가 잡은 고기를 끌어올리는 사람이라면, 경제인은 도마 위에서 다루는 사람, 정치인은 잡은 고기 나눠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결국 예술가는 그 고기를 잡기위해 낚싯줄을 던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강 작가에게 청주는 어떤 곳인가요.

“청주는 제게 어머니 같은 곳입니다. 저에게 시작점이며 행운을 준 곳입니다. 어쩌면 태어나긴 했지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애틋한지도 모르겠어요. 외가가 있고 이모가 살아서 주말마다 왔던 추억이 있어요. 지금도 인터넷으로 청주를 클릭해서 늘 청주소식을 살피고 있습니다. 뉴욕에 있어도 우암산의 낮은 능선이 어머니 품처럼 늘 그리워요.”

-2018년 직지코리아에 작품을 전시했는데.

“6000명의 어르신들이 그린 그림이지요. 전시가 끝나고 고향에 기증했습니다.”

-작품구상은 주로 언제 하는지요.

“샤워할 때 머리가 가장 맑아집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당뇨로 돌아가셔서 늘 조심하고 있어요. 그러나 한국의 비빔밥과 떡볶이는 여전히 맛있네요.”



조금 과장해 표현한다면, 강익중은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세계를 제패한 징기스칸과 백남준의 뒤를 잇는 3인일 것이 분명하다. ‘부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쥔 화가지만 그는 지금도 첫 유학시절 살았던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작업을 한다. 음식이 싸고 맛있어 떠나지 못한다며. 부인 마가렛 리와 아들 기호, 그리고 한국에서 데려온 진돗개 허드슨 강과 함께.


강익중은
*1960년 청주에서 출생
*1984년 홍익대 졸업
*1987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드를 졸업
*1994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멀티플 다이얼로그〉전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1999년 독일의 루드비히미술관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선정
*2009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과 2인전 ‘삼라만상 : 멀티플/다이얼로그∞’
-2016년 런던 템즈 페스티벌 ‘집으로 가는 길’
-2018년 순천만 국제정원 <현충정원>

*공공미술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청사 메인홀의 벽화
-뉴욕 지하철역의 환경조형물
-UN본부에서 ‘AmazedWorld’ 전시
-뉴욕 기차역 플랫폼 천장에 설치작품
-알리센터에 ‘희망과 꿈’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 로비 벽화 ‘해피월드’
-광화문 복원현장에 있는 ‘광화에 뜬 달, 산, 바람’
-경기도미술관의 ‘희망의 벽’
-상하이 Expo 한국관 ‘내가 아는 것‘
-순천국제 정원박람회장 ‘꿈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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