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만(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낡은 음반
낡은 음반

 

1. 낡은 음반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이었다. 가끔 아버지가 집에서 쉴 때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 음악을 듣곤 했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튕기는 기타에 맞춰 옛날 가요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는 추억 속의 공간과 시간일 뿐이다. 그 후로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릴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떠오른다.

당시, 우리 집에는 스피커 앞에 귀를 대고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개의 이미지를 상표로 하는 일산(日産) 빅터(Vivtor MSL25) 턴테이블과 스피커가 있었다. 매번 음반을 올려놓고 정성껏 닦은 바늘을 얹으면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심취하곤 했었다. 앰프나 스피커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음질이 풍성하고 맑았었다. 아버지는 유독 ‘이시다 아유미(石田良子)’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즐겼고, 하도 여러 번 들어서 나도 따라 부를 정도였다. 당시 집에는 LP와 SP 등 음반이 제법 있었는데, 주로 아버지가 즐기셨던 일본 음반이었다. 팝송과 한국 음반도 드문드문 있었다. 그때 그 음반들은 잦은 이사와 관리부실로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한 장의 음반이 있다. 이 음반이 그렇게 희귀한 것인 줄, 당시에는 몰랐었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50~60년대에 국내에서 잠시 생산되다가 완전히 단종된 형태의 음반이란다. 은색 알루미늄 원판에 플라스틱을 입히고 거기에다가 음을 새겨 넣은 음반이다. 크기는 일반 LP사이즈이긴 하지만, 한 면에 한곡 밖에 수록되지 않는 사실상 SP라 해야 할 것이다. 미군의 데모용 음반 또는 시제품용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앞면에 <애수(哀愁)의 항로(航路)>라는 제목아래 이병룡(李秉龍) 작곡, 김진응(金軫應) 작시, 김진응 노래라고 쓰인 라벨이 붙어 있고, 뒷면에는 <버들잎 피는 고향(故鄕)>이라는 제목 아래 이병룡 작곡, 김진응 작시, 이병룡 노래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제작년도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재되어 있지 않아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작곡에 능한 이병룡이라는 분과 작시에 능한 김진응 씨 두 분이 한 곡씩 취입해 제작한 합작품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의아스런 것은 내가 그 음반을 처음 본 그때부터 자켓이 없이 그냥 황색 서류봉투에 들어 있었던 점이다. 아마도 자켓까지 제작해 시판된 완제품은 아니었던 듯하다. 음반은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음이 새겨진 플라스틱이 떨어져 나간 음반은 더 이상 음을 재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갔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러 차례의 이사와 형제들의 결혼과 분가로 가족은 이산했고, 그 음반의 존재도 까맣게 잊혀져 갔다.

 

해군상사시절
해군상사시절

 

2. 작은 역사



아버지는 진(軫)자 응(應)자를 쓰셨다. 안동(安東) 김씨 제학공파(提學公派) 20세손으로 ‘응’자 돌림이셨다. 1925년 8월 29일, 충남(忠南) 천원군(天原郡) 동면(東面) 장송리(長松里) 457번지에서 5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천당(生居鎭川, 死居天堂)”이라고 불리는 진천에 이웃한 병천(竝川) 인근의 동면 역시 가난한 산간오지의 농촌마을이었다. 당시로서 조선팔도 어느 산골인들 가난의 질곡 없는 곳이 없었을 시기다. 내가 어릴 적, 60년대만 하더라도 전기도 없었던 고향마을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늘 푼수 없는 한적한 두메 산천에 불과했었다. 하물며 내 아버지가 자랄 적에는 어떠했을 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내가 어릴 적, 장송리 마을 초입에 커다란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가끔 아버지는 삭아빠져 움푹 패인 그 느티나무 밑둥 구멍에 도깨비가 산다고 말씀하셨다. 일평생을 해외로 떠돌던 내 아버지는 좀체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의 귀향에 동행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설 명절과 아버지의 휴식이 일치해 딱 한번 함께 고향을 찾은 적이 있었다. 내 손을 꼭 잡고 마을로 들어서던 길이었다. 그 느티나무 밑둥치로 나를 이끌고 가서는 “이 구멍에 도깨비가 살았었는데! 아버지가 너 만할 때엔 늘 여기에 푸르스름한 불빛이 둥실둥실 떠 있었지!”라고 하셨다. 그때, 어린 내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며 가슴이 콩닥거렸다. 도깨비를 볼 수 있다는 신기한 기대와 동시에 사라진 도깨비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으리라. 백주 대낮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난 터라 도깨비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아버지와 동행해 찾은 첫 고향이었다.

도깨비들과 어울려 놀던 아버지는 소년기를 고향에서 지냈다. 마을 맞은편 산허리를 하나 넘어가면 지금도 남아있는 장송소학교를 다니셨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해 조선의 청년학생들을 선발해 일본으로 데려가 일제(日帝)식 교육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었던 상(相)자 원(元)자 할아버지의 두뇌를 이어받은 아버지 형제들은 나름대로 학식 있는 집안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아버지는 1938년 경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제에 선발되어 먼저 떠났던 형을 따라 동경(東京)으로 갔다. 소학교에서 인정받아 선발된 아버지의 맏형이 이미 동경으로 떠난 후였기에 아버지의 도일(渡日)은 어렵지 않았었다. 당시,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잠식한 일제는 발악적으로 전장(戰場)을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해가고 있었다. 조선반도 전체가 식민지 강점(强占) 상태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업이나 노동취업 등 자의로 도일하거나 또는 강제에 의한 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끌려가는 풍조가 만연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먼저 가 있던 형 밑으로 가서 근공검학(勤功儉學)의 대열에 올랐다. 아버지의 형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재 가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해 목재사업을 제법 그럴 듯하게 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형 밑에서 일을 거들면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즈음 아버지는 귀향하는 형을 따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3년경이다. 귀향은 했지만 마땅한 일자리도 없이 어영부영 지낸지 얼마 안 되는 1945년 3월 22일, 아버지는 집안의 중매로 30리 쯤 떨어진 신계리(新鷄里) 마을 처녀 윤만례(尹萬禮 : 1928~1997) 씨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스물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세 살 아래였다.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장가들어서 인지, 가정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못했던 듯하다. 너무 급작스런 결혼에다가 가정에 매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버거웠을 것이다. 게다가 청년기를 아시아 최대 도시 동경에서 보냈던 터라 한평생을 촌구석에서 썩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간절했을 것이다.

겨우 17살에 시집오게 된 어머니는 생전에 늘 푸념을 하셨다. 3남4녀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평생 땅만 부치고 살아오신 부모님께 원망이 가득했었다. 남들처럼 번듯한 공부는커녕 소학교만 겨우 졸업시켜놓고는 ‘누에치기’, ‘가마니짜기’며 갖은 농사일로 부려먹다가 다 자라지도 않은 나이에 시집을 보내버렸다고 했다. 아래로 줄줄이 있던 딸 셋에 아들 셋 등 동생들 뒷바라지로 어머니는 삶도 배움도 누릴 수 없었던 게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당시 조선팔도에 파다했던 ‘처녀공출(處女供出)’, 이른바 “위안부로 잡아간다.”는 소문에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젊은 여자들을 죄다 시집보내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철도 들기 전에 어린 신랑을 따라 시집을 왔었다.

귀향한 아버지의 형은 손에 쥔 거금으로 고향에 제법 땅을 샀으나 토지개혁으로 몰수당하수당하고, 남은 재산마저 곧이어 발발한 6.25 전쟁 통에 거의 다 날려 버렸다. 아버지 집안 장남의 경제적 타격은 일어서려던 가세를 주저 앉혔고, 가족들은 고된 농사에서 벗어날 기회를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는 맏형 외에 형이 두 분 더 계셨다. 그러나 크게 배움도 없었고 그저 토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어린 나이에 동경 물을 먹은 청년이었던 아버지로서는 땅을 뒤져야 하는 농사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하염없는 들녘을 바라보며 아침에 눈뜨고 저녁에 잠드는 일상의 무료함이 들끓는 청년의 가슴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 땅 동경에서 소년기를 지내다 스무 살 즈음 해방된 조국의 고향으로 돌아 와 가정을 이루었으나, 어디 한 곳 마음을 두지 못한 채 답답한 시골생활을 벗어날 구실만 찾고 있었다. 어머니를 고향집에 둔 채, 청주에 터를 잡은 맏형을 따라 청주에서 기거하던 아버지는 인근의 또래였던 안다성(1930~ ) 씨 등과 어울려 매일같이 노래 부르며 세월을 잊으려 했다. 몰락 양반 가문이었지만 한학 전통이 밴 집안가풍을 거슬러 본격적인 가수(歌手)의 길로 나갈 수는 없었다. 친구로 지냈던 분들이 그 후, 대한민국의 일시를 풍미했던 대 가수이자 작곡/ 작사가로 이름을 떨쳤던 것만 보더라도, 당시 아버지의 음악 수준이 아마추어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고향에서 가수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하루바삐 고향을 떠날 생각으로만 가득했었다. 무조건 고향을 떠나고자 했었던 걸 보면 아마도 영혼이 무척이나 자유로운 분이였을 것 같다. 해방정국이었다. 도시는 도시대로 연일 이어지는 찬탁반탁 운동에 어지럽고, 농촌은 농촌대로 토지개혁으로 어수선한 틈바구니 속에서 아버지는 미래로의 희망을 찾아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옹색하고 갑갑한 시골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6.25가 발발했고,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육군으로 입대했다. 무슨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에 입대했다. 그해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아버지의 동기인 해군13기생 중에서 해병대1기를 차출했으나 아버지는 해병대로 가지 않고 그냥 해군에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해군13기 동기생 모임에 해병대1기생도 함께 참석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1950년 7월 2일 주문진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최초의연합군 첫 해전인 ‘주문진 전투’에 참여했다. 주문진에서 남침 인민군과 첫 교전 승리의 공훈으로 1953년 1월 20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1953년 7월 종전되고도 한참 뒤까지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된 아버지는 해군 기지가 있는 진해(鎭海)의 근무지로 어머니를 불렀다. 신혼 초부터 아버지는 어머니만 고향에 남겨둔 채 바깥으로 떠돌다 전쟁을 맞았고, 전쟁이 끝나고도 배를 타는 해군생활의 연속이니, 장송리 시댁과 청주의 시아주버님댁을 오가던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던 듯하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두고두고 들었던 그 시절 얘기는 늘 눈물로 끝이 나곤 했다.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생활에 신물이 난 어머니는 하루바삐 시집살이를 벗어날 수 있도록 진해의 남편이 불러주기를 학수고대했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진해에서 살림을 합쳐 명실상부한 신혼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근 10년이라면 그 심정 어땠을까? 아버지에게 해군생활은 답답한 시골 생활로부터의 도피처였고, 바다는 영원한 동경의 해방구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참 야속하고 철없는 남편이었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가수의 꿈은 바다를 누비는 생활로 다소 위안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사관 생활이라는 것의 목표치가 그다지 높았을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생활의 압박이나 스트레스도 훨씬 적었을 터였기 때문이다. 해군생활에서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음악친구들과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실패한 가수의 꿈’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땅을 버리고 바다로 간 청년은 과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까?

비로소 안정을 찾은 결혼생활이 한해두해 지나가면서 자식들이 태어났다. 지금 나에게는 56년생 형 하나와 65년생 남동생 하나가 있다. 흔히 삼형제라 불렸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형 위로 누나 둘이 더 있었지만 모두 낳다가 죽었다고 하고, 형 아래로도 형 하나와 누나 하나가 더 있었다. 살아생전에 어머니는 유난히 잘 생기고 토실했던 죽은 형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어느 날 들쳐 업은 포대기가 풀리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맥없이 죽어버렸다는 사연이다. 이때 놀란 가슴이 평생을 두고 경기(驚氣)가 되어 화병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죽은 형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누나는 내 기억에도 분명하다.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동그맣고 하얬던 누나는 정박아였다. 신계리의 외가집에 맡겨 키우던 누나는 내가 국민학생때 집을 나가 그길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외지를 떠돌다 길에서 죽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그 ‘정숙’이 얘기를 하다가 눈가에 눈물을 짓기도 했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옆서. 보안에 신경 쓴 숫자처리가 군인정신을 엿보게 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옆서.
보안에 신경 쓴 숫자처리가 군인정신을 엿보게 한다.

 

3. 기억의 저편



내 유년의 기억은 진해에 있었던 마당 넓은 집에 머물러 있다. 마당 가운데 우물이 하나 있고 그 우물가 정원에 포도덩굴이 올라가는 집이었다. 마을 입구에 소방서가 있었고 마을 뒤로 철길이 지나고, 철길 아래에는 중앙국민학교가 있었다. 형은 그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지금도 찾아가라면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초여름, 노랑나비들이 팔랑거리는 마당 한쪽의 채마 밭 사이로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그 집에서 동생을 낳았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한참을 끙끙거렸고, 이내 웬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아버지를 불렀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내 동생이다. 1961년 겨울, 아버지는 훈련함을 타고 미국으로 항해 중에 나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동생의 출산을 매우 신경 쓰는 기색이셨다. 아주 어린 나이였음에도 마당에서 장독간으로 수없이 오가는 아버지의 잰 발걸음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남은 우리 삼형제는 먼저 떠난 다른 형제들이 액땜을 해준 까닭인지, 탈 없이 잘 자랐다. 형은 학교를 다녔고 동생은 어려서였는지, 아버지는 곧잘 나를 데리고 직장에 출근하곤 하셨다. 지금은 ‘진해기지사령부’라고 부르는 ‘해군통제부’였다. 정문을 들어서면 진입로를 따라 풀밭이 이어졌는데, 여치며 방아깨비며 메뚜기들이 많았다. 풀섶을 헤칠 때마다 퍼드득 날아오르는 방아깨비를 잡아서 내 손에 얹어 주곤 하셨다. 형이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대처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가계지출이 늘어나면서 월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상선(商船)을 타기 위해 20년 가까이 재직하던 해군에서 상사(上士)를 마지막으로 제대했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도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1966년 경, 우리 가족은 부산의 초량동으로 이사를 했고, 그 두 해 뒤인 1968년에 나는 동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몇 번의 이사 끝에 마침내 구봉성당 아래 마을인 초량3동 734번지에 집을 사서 이사했다. 국민학교 3년 때다. 그 후로 우리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줄곧 그 집에서 살았다.

부산에서 아버지는 유수한 상선회사인 남성해운, 조양상선 등에 취업해 처음에는 벌크선, 카케리어 등을 타시다가 나중에는 컨테이너선 등을 타고 동남아나 일본 등지를 항해했다. 배가 부산항 3부두나 4부두에 정박해 있을 때는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서 부산역 옆 굴다리를 지나 부두까지 걸어서 배에 올라가곤 했다. 외국을 드나드는 배에는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다. 기름 냄새인 듯도 하고 향수냄새인 듯도 한 야릇한 냄새는 아버지 기억의 일부이다. 언젠가는 나를 배의 욕조로 데려가 발가벗기고 목욕을 시켜 주기도 했다. 배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흔치않은 먹거리며 장난감 같은 것들을 한 손 가득 들고 오기 일쑤였다. 외항선의 특권이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귀가가 2~3주 정도의 단기일 때는 국내선을 타신 것이고 1년을 만기로 외국을 나가실 경우는 외국 선적에 송출된 경우였다. 국내선보다는 외국선적을 탈 때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주로 외국선적을 타고 1년씩 출항했었다. 내 나이에 비례하는 세월만큼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공유했던 시간의 양이 절대적으로 희소했던 만큼 기억의 질은 매우 높고 선명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온통 ‘그리움’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국어시간이었다. 시를 지으라는 과제에 나는 ‘배’와 ‘항해’에 관한 시를 지었고, 집에 돌아가 그 얘기를 해서 어머니에게 칭찬을 듣고 우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그때 우리 집에는 먹거리나 생활용품 중 귀한 외제들이 제법 많았다. 당시로서는 구경조차 어려운 파인애플 통조림, 초콜릿, 커피, 분말쥬스 등 이른바 ‘물 건너 온 것’들이 즐비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가져다 준 일제 그림물감이나 전자제품인 아이와(AIWA) 워크맨, 0.5mm 샤프펜슬 그리고 리바이스 청바지는 나의 허영심을 북돋우기에 충분했었다. 그때 그 아이와 워크맨은 지금도 내 책상 서랍 한쪽에 아버지처럼 앉아 있다. 6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는 ‘가정방문’이란 게 있어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 가정형편을 눈으로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떠벌이지 않았지만, 담임선생님이 외항선을 타는 아버지의 직업을 알고는 우리 집에 찾아 왔다.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데, “일제 이젤과 물감이 필요하니 구해 줄 수 있습니까?”라는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예!”라고 대답하고 담임을 보냈다. 저녁 밥 때였지만 갑작스런 담임의 방문에 어쩔 수 없이 골목 입구 중국집 음식을 시켜야 했다. 덩그런 둘레판 위에 달랑 자장면 한 그릇과 단무지 한 종지가 전부였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풍족하고 부유한 형편도 아니었던 우리 집을 방문한 그 선생님이 크게 실망했을지 모른다. 지금 같았으면 탕수육 한 접시라도 더 얹어 드렸을 텐데. 어쨌건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해외의 바다를 떠돌며 번 돈 탓에 자택도 있었고, 5학년 때 이미 TV며 냉장고 그리고 전화까지 놓고 살았으니 나름대로 괜찮은 형편이었다.

그러나 연세가 들어가면서도 1등항해사 이상으로 올라 갈 수 없었다. 선장 면허를 따로 준비해서 취득해야 했다. 해양대학 출신이 아닌데다가 해군경력자가 선장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 응시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낙심하는 모습에 내 가슴이 시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면허시험장으로 나가신 후, 어머니는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매우 낙심했다. 며칠 뒤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아버지의 이름은 없었다. 그 후로 몇 번 더 시험을 치르고 나서야 선장면허장을 받을 수 있었다. 1978년경이었다. 그러나 면허장을 받았다고 당장 폼나는 선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늘 톤수가 적고 낡은 배가 배정되기 일쑤였다. 비(非)해대출신 선장에 대한 차별대우였을까? 어쨌건 선장 면허를 받은 이후 우리 집안 형편이 조금 더 나아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따스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큰 태풍이 몰려오던 어느 새벽,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배에 사고가 나서 며칠간 인천에 머물러야 하니 돈이며 옷가지 따위를 챙겨 오라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으로 갔고, 아버지는 “정박했던 배가 태풍에 떠내려가다가 다른 배와 부딪쳐 손괴를 입혔고, 그 책임을 아버지가 져야한다. 아마도, 해난심판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거다.”라는 말씀이었다. 몇 달을 끌다가 마침내 ‘천재지변으로 인한 과실’로 판결되었지만, 이 사고로 한참동안 승선하지 못해 집안 경제는 큰 타격을 면하지 못했고, 그 영향은 두고두고 이어졌었다.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는 독특했다. 첫 걸음을 뗄 때마다 마치 군인들이 제식훈련을 할 때처럼 발뒤꿈치를 한번 탁 마주치고는 앞으로 걸음을 떼는 습관이 있었다. 유년 때부터 들어 온 이 뒤꿈치 부딪치는 구두소리는 귀에 익어, 언제 어디서나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집이 골목 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터라 집으로 오는 길은 유난히 길다. 통금이 있을 때였다. 10시만 넘어도 다들 잠드는 동네 골목 초입에 아버지가 들어서면 내 귀가 먼저 알아 차렸다. 탁 하고 발뒤꿈치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캭’ 하는 가래침 뱉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두 소리가 연이어 났다면 백발백중 아버지다. 내 청각을 믿는 나는 이내 선잠에 들었던 몸을 일으켜, 대문간으로 뛰어나가 문고리를 열어 반긴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아버지의 손에 돌가루종이로 만든 봉투에 단팥빵, 크림빵, 소보로가 들려져 있었다. 아버지의 귀가는 오랜 그리움의 보상이었다. 내가 지금도 단팥빵을 즐기는 것은 맛이 아니라 아버지의 추억 때문임을 내 자식들은 안다.

오랜 항해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다음 항차까지 한 달 이상을 집에서 쉬었다. 친구도 만나고 친척들과 안부도 전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형제들과 방에 모여서 음악듣기를 즐겼다. 이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아버지가 직접 작시하고 노래까지 불렀던 <애수의 항로>다. 60년대 창법이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음률도 흥겨웠다. 하지만, 당시, 10대였던 내 귀에도 알 수 없는 애수가 느껴졌던 듯하다. 아버지가 장만해 두신 빅타 앰프와 턴테이블 그리고 스피커. 몇 달에 한 번씩 바늘을 바꿔 끼워야 하는 불편은 있었지만, 역시 음악은 턴테이블로 들어야 제 맛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집에 계신 어느 날이었다. 초저녁에 대문 벨이 울렸다. 내가 나가 보니 낯선 남자 두 명이 대문 밖에 서서 아버지 이름을 대며 집에 계시냐고 물었다. 나를 따라 나온 아버지를 이들이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 갔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파김치처럼 풀린 몸을 휘저으며 들어섰고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6.25 때 자진월북한 아버지 사촌의 행적에 대해 취조를 당하셨단다. 대학생이던 나는 직감적으로 일본 출국이 잦은 아버지를 간첩혐의로 엮으려는 음모였음을 느꼈다. 그러나 워낙 오래 전의 일이었고, 아버지의 그 사촌과는 6.25 월북 이후로 사실상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되어 어떠한 혐의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풀어줬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박정희의 유신과 전두환의 군부독재 시절,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간첩이 얼마나 많았을까?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 후부터 아버지에게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군대생활 이후, 그러니까 195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써오시던 일기쓰기를 중단했다. 당시, 집에는 회색빛 표지의 대학노트 수십 권이 장롱 깊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마도 거의 매일 또박또박 새겨 넣어 줄잡아 1년에 한권씩 쓰셨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그 비밀공간을 한 번도 열어 보지 않다가,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한두 페이지 읽어 본 기억이 다다. 아버지는 매우 정교한 기록자였다. 나에게 혹여 그런 기록벽이 있다면 아버지의 피가 분명하다. 그러나 혹시 다시 이런 취조가 있으면 일기장이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일기장을 깊숙이 치워버리고, 더 이상 일기쓰기도 그만두어 버렸던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조교를 하면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1985년 겨울, 1년 계약으로 송출나가신 아버지와 국제전화로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하다가 타이완(臺灣)으로 입항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당시 관심했던 『후쓰 문존(胡適文存)』을 사 달라고 했다. 중국현대철학자인 후쓰의 명문들을 네 권으로 엮은 문집이다. 열흘 쯤 뒤에 국제우편으로 도착한 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 며칠 후, 타이완을 출발해 오키나와 근해를 통과해 귀환하던 선상에서 갑작스런 ‘위천공’으로 손쓸 겨를도 없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불과 며칠 전에 통화했던 전화선 너머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쩌렁거리는데 이런 날벼락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키나와의 나하 항을 출발한 비행기에 실려 온 아버지의 시신을 침례병원 영안실에 모시고, 장례절차를 진행해야 했다. 믿을 수 없는 ‘사고사’였기에 사망신고 절차는 까다로웠고 회사 측과의 협상도 여의치 않았다. 사망신고 절차가 마무리되고, 아버지는 침례병원 영안실을 떠나 마지막 귀향에 올랐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귀향에 마을 친지와 친척들도 적이 놀라했다. 고향집에 도착한 영구는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노제를 마치고 이내 마을 뒤편의 선산으로 향했다. 마을의 지관이 미리 봐둔 묘 자리에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불그스름한 흙은 마치 팥고물을 흩어놓은 듯 포실포실 했다. 신축생(辛丑生)은 회피하라는 지관의 말에, 나는 아버지의 하관을 보지 못했다. 마을 지인들이 나서서 해준 흙밟기와 봉분 쌓기 그리고 뗏장 입히기 등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장례식은 순조로웠다. 어머니는 얼마나 야속한 남편이었기에 서울 집에 머무르며 장례식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그날 밤, 눈이 내렸고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서울 집과 고향을 오가며 삼우제까지 모든 장례절차를 마친 후, 나 홀로 부산의 하숙집으로 돌아 온 날 밤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내준 『후쓰 문존』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마침, 조문으로 내 하숙방을 찾은 친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 와 우두커니 섰을 때까지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노래하는 아들
노래하는 아들

 

4. 아들



마흔에 얻은 아들은 올해 고3이 되었다.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한 ‘이방카’를 보고, 저렇게 생긴 여자와 결혼해 외국에서 살겠다는 아이다. 애시당초 한국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강제된 애국심의 강박증은 벗어난 지 오래다. 욕망도 크고 승부욕도 강해 매사에 늘 지고는 못산다. 60명을 선발하는데, 1,200명이 응모한 부산국제중학교에 입학했으니 기막히게 운도 좋다. 자율학습을 강조하는 이 학교에서는 학업성적도 중시하지만, 수영, 축구, 음악 등 다양한 실기능력 배양에 더 치중한다. 일반 중학교에 비해 일인일기(一人一技) 수업이 매우 강화되어 있어 아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장기를 훈련하는데 여념이 없다. 아들은 유독 노래에 열중했다. 학내에서 활동 중인 두 팀의 밴드에 모두 리더보컬을 맡아 활동했다. 자율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학풍의 중학교를 마치고 어렵사리 특수목적고인 부산일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눈에는 아무래도 문과적인 재능이 더 나아보이는데도, 아들은 기어코 과고를 진학해 장차 컴퓨터나 로봇공학 쪽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낙천적이고 태평스런 성격, 노래 부르기와 인간관계 맺기를 즐겨하는 아들에게 이과(理科)보다 문과(文科)가 나은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진단은 막연한 추측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아들은 소원대로 과고에 진학했지만, 1학년 들어가자마자 매우 큰 고통과 좌절을 감내해야 했다. 수학이 문제였다. 물리는 흥미는 있으나 성적이 오르지 않았고, 화학과 생물은 노력에 비해 친구들보다 성적이 저조했다. 몇 번 학교를 그만두고 일반고로 전학할까 고민도 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선행학습으로 성적을 유지해 온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기에는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011년, 내가 연구년을 맞아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이를 데리고 1년 동안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보낸 것이 패착이었다. 인터네셔널스쿨에 다닌 터에 영어는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을 위해 수학능력을 상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고를 전망했었더라면 아마도 연구년을 따라 오지 말았거나 선행학습을 더 치열하게 했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들은 뜻밖으로 빠르게 적응해서 잘 이겨냈다. 1학년 2학기부터 제 페이스를 찾더니 2학년 1년 동안은 제대로 성적을 관리해 입학 당시 중하위권이던 성적을 중상위권으로 끌어 올렸다. 이 학교는 2학년 2학기 중간고사까지의 성적만으로 2학년 이수 직후 조기졸업을 시켜주는 것이 메리트가 되어 있다. 학년 정원 100명 중 40등 이내까지가 누리는 특혜다. 아들은 40등대 초반으로 조기졸업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올해 3학년에 진급해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쿨하다면 쿨한 성격으로 지난 세월은 다 잊었단다. 상처난 자존심, 3학년에 잔류해 1년을 더 해야 한다는 ‘루저’의 강박감 등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어른들보다 더 능글맞게 잊고 지내는 듯한 태연한 모습이 갸륵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속으로 얼마나 깊이 이를 갈고 있을까!

과고는 나름 최상위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동체의식이 적은 게 문제라면 문제다. 아들은 과고에 들어와서도 밴드의 보컬을 맡아 늘 노래를 불렀다. 성적에 주눅든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 시간을 손해보는 이런 봉사나 희생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1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아들의 노래 재주를 인정해 수업시간은 물론 교내외 공식 행사 때마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게 했다. 언젠가, 자기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구청(區廳)에서 주최한 고교생 밴드경연대회에 참가한다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었다. 사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지만, 무대에 올라서서 대중을 마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목소리가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노래는커녕 인사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숨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들은 무대에서 노래를 곧잘 하는 것은 물론 무대매너도 제법이다. 무대에 올라 밴드와 곡목을 소개한 후 서너 곡을 열창하고 마무리 인사를 끝낸 후 무대를 내려올 때까지 일련의 과정이 물흐르 듯 매끄럽다. 당황하거나 떨지 않는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공연이 끝나고, 끼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러 왔다는 어떤 사람에게서 명함을 받아 왔다. 그가 듣기에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들은 늘 그렇게 말한다. “무대에 서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고 즐거워요!”



 

김태만(한국해양대학교 교수)
김태만(한국해양대학교 교수)

 

5. 내 아들에게서 듣는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대학, 대학원 그리고 박사과정까지 거치며 중국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내 전공은 중국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으로 바뀌었고, 어느덧 『후쓰 문존』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가 되었고 나는 학문적 목마름으로 중국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그 누구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던 시절, 중국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할 요량이었다. 나는 1993년 3월 베이징으로 가서 입학시험을 치르고 그해 9월 입학했다. 그리고 3년의 과정을 마치고 1996년 7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무슨 인연이었는지는 모른다.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로부터 강의제안을 받았고, 1998년부터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평생을 해외로 떠돌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현재 돌파를 꿈꾸는 낭만주의 탓이었을 것이다. 나의 베이징 유학 역시 당시로서는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이었다. 나의 아들은 나에게 대놓고 말한다. 대학만 졸업하면 외국여자와 결혼해서 외국에서 살겠노라고.

아버지는 동시대 여느 사람들처럼, 일제시기 가난과 질곡의 세월을 견디다가 6.25 전쟁의 참상을 거쳐 근대화 초기에는 수출역군으로 산업화 전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삶을 긍정하고 음악을 즐기며 자식들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소처럼 헌신 봉사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자식들과 뒹굴며 음악을 듣고 함께 노래 부를 줄 알았던 아버지. 그래서였을까?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앓으시다가 일찍 타계(他界)한 것은 아버지만의 비운일까?

아버지는 25년생으로 나와 같은 소띠고, 어머니는 28년생으로 내 아들과 같은 용띠다. 나와 아버지는 36년 차이고 나와 아들은 39년 차이다. 아버지와 내 아들 사이에 단지 나라는 존재가 매개되어 있을 뿐인데, 75년의 세월을 격하고 있는 그 둘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아내조차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먼 훗날 내 아이들은 내 아버지를 기억할 수나 있을까?

지난겨울,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아버지의 그 낡은 음반을 되찾았다. 음반을 수선해 주겠다고 가져갔던 6촌 조카가 수선은커녕 제 스스로조차도 내팽겨 두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어 되돌려 받아 왔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일단 소리는 들렸다. 떨어져 나간 프라스틱을 조금만 복원하면 목소리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40년 만에 듣는 음반 속 목소리는 마치 아버지가 살아오신 듯한 전율이었다. 음원을 완벽하게 복원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내 생에 최고의 유품이다. 아버지의 음반이 아니었더라면 노래를 즐기는 아들이 그냥 돌연변이라고만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 했던가. 가끔 나는, 노래하는 내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듣는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