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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20. 진천 배티성지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 20. 진천 배티성지
  • 동양일보
  • 승인 2018.12.20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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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길을 따라 걷는 피정체험
배티성지 대성당.
순교자의 길.

(동양일보) 아픔이 아무는 성찰의 시간



꽃들이 여기저기서 해산의 비명을 지르더니, 산천초목 모두 푸른 기운 가득하더니, 이 산 저 산 붉게 빛나더니, 마른 가지에 찬바람만 나부낀다. 석양속에 빛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환생과 순환의 기나긴 시간이 담겨있다. 낮잠 자는 고양이 돌담 사이에도, 은빛 비늘이 춤추는 호숫가에도, 뱀 허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에도, 소나무 미루나무 잎에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니 마음이 심란하다. 세월에 지치고 남루해진 모습, 거짓과 위선과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 무모하게 젊음만 소진하지 않았던가. 나 이제 돌아온 탕자처럼 삶의 신산함을 떨쳐버리고 내 안의 깊은 뜨락, 금단의 정원이라도 가꾸고 싶다.

몇 해 전, 세상일에 번잡하고 방황할 때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변 선생, 신앙생활 하시나? 우리 성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하며 새 생명을 꿈꾸면 어떨까? 내가 대부(代父) 잘 할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노라 했고 6개월간의 교리공부 끝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그날 이후 주일마다 미사 보는 두 시간은 설렘과 긴장과 여백의 미로 가득하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고, 여럿이 함께 해서 좋고, 묵상하며 삶의 군살을 걷어낼 수 있어 좋다. 때로는 마음 부려놓고 무념무상의 호젓함도 내겐 새 살 돋는 시간이다. 대자연을 통해 야위어진 삶을 어루만지는 것도 좋지만 아픈 마음을 도닥거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피정체험을 한다. 불가의 템플스테이와 같은데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약자로 리트릿(Retreat)이라고 한다. 일상을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 성찰, 기도 등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신앙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행위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북부의 어촌 갈릴리에서 예수는 온종일 쫓아다니는 군중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다. 예수의 제자도, 중세의 성인도 산중기도를 했다. 그 전통이 2000년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소울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치유와 힐링과 묵상을 통해 모든 욕망을 부려놓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진천 백곡의 배티성지.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순교지다. 160여 년 전, 천주교 신자들은 종교에 대한 억압과 박해를 피해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지역이자 첩첩산중인 이 일대에 15개의 비밀 교우촌을 만들고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신자들은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며 숲가마를 운영하면서 두려움을 용기로 이겨내고 생명의 가치와 하늘의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최양업 신부는 한 달에 3일 정도 잠을 자고 1년에 7천리를 걸어 다니며 선교활동을 했다. 길에서 살았고, 길 위에서 참된 진리를 전파하고, 길과 함께 새 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와 함께 순교한 사람들의 묘소가 28기나 있다.

순교자의 길,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으니 치유의 신비를 느낀다. 출구가 없던 나의 삶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하루하루 극적이고 버거운 삶에 평화가 깃든다. 최양업신부박물관은 스토리텔링으로 꾸며져 있다. 순교의 역사를 자료와 문헌, 영상과 미디어, 디자인과 미술 등으로 꾸몄는데 산속에 이토록 훌륭한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람들은 최양업 신부가 직접 써 내려간 라틴어 친필 서한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음성 꽃동네를 방문했을 때 앉았던 의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2개의 의자가 있는데 하나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또 하나는 작고 초라하다. 교황은 미리 준비한 화려한 의자에 앉지 않고, 신자들이 앉는 초라한 의자를 선택했다. 진정한 권위는 가장 낮은 곳에 있지 않던가.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신자들로 가득하다. 성당에서 예배를 보고, 소나무 숲을 따라 순교자의 길을 걸으며, 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아픈 역사를 만나고, 초가집의 옛 신학교 풍경을 품고 나오니 가슴이 먹먹하다. 피와 땀과 눈물 없이는 위대한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모두들 소풍처럼 가볍게 왔지만 진한 감동으로 마음의 무장을 하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 몸과 마음이 기진했을 때 기도하며 쉬고 일하는 단순한 일과만으로도 힐링이고 구원이다. 두 손을 모아보자. 마음의 평화가 오고 아픔이 아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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