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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김영조 낙화장
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김영조 낙화장
  • 동양일보
  • 승인 2019.01.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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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궈진 ‘인두의 끝’에선… 산이, 바위가, 삼라만상이 되살아난다
평생 인두와 함께 한 외곬의 장인… 올초 국가무형문화재 136호 지정
‘관광상품’ 폄하에서 400년 역사 지닌 ‘전통예술’로 인정받아 기뻐
 

인두가 춤을 추듯 종이 위를 지나간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몸통을 뉘거나 예리하게 날을 세우거나 힘차게 쓸어내리면서 마치 음률을 타듯 종이 위를 넘나든다. 숯불에 알맞게 달궈진 인두가 지나갈 때마다 인두의 끝에서 하얀 연기가 나면서 미묘한 농담의 그림이 태어난다. 종이의 여백은 금세 산이 되고 바위가 되고 대나무, 국화, 백로 등 삼라만상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생생하게 채워진다. 화려한 손놀림이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이.

신의 손길을 지닌 그는 누구인가.

낙화장 김영조(66)씨. 평생을 손끝에서 인두를 놓지 않고 전통기법으로 그림을 그려온 장인이다. 2019년 새해 벽두, 문화재청은 인두그림 ‘낙화장(烙畵匠)’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로 지정하고, 그를 보유자로 인정했다. 충북무형문화재(22호)가 된 지 8년. 낙화를 시작한 지 47년 만의 일이었다.

미세먼지가 벗겨지고 청량한 햇빛이 비치는 겨울날 오후 그를 만나고자 보은읍에 있는 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를 찾았을 때 그는 연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즘 축하전화가 많죠?

“네. 여기저기서 오네요. 축하전화도 많고 인터뷰 요청도 많아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낙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을 딛고 전념해 오신 보람이지요. 그런데 낙화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죠. 인두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일명 ‘인두그림’이라고 하기도 하고, 불을 이용한다고 해서 ‘불그림’이라고도 합니다만, 낙화는 그 옛날부터 문헌에 ‘낙화’로 표기돼 왔어요.”

-낙화의 역사가 꽤 오래된 것 같군요.

“시작된 곳은 역시 중국이죠. 700년 전 명나라말기에 무풍자 무염이라는 사람이 낙화로 이름을 날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澂’에 조선중기 정부인 장씨(장계향)가 낙화를 잘 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조선중기라면 약 400년 전쯤으로 계산되지요. 그런데 문화라는 것이 어느 시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도 중국으로부터 낙화가 들어온 뒤 오랫동안 인두를 다루는 여성들 사이에서 발달돼 왔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400년 전이 아니라 500년 전일 수도 있고 그 이전일 수도 있겠지요. 장씨라는 분은 사임당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시와 문장에 능하고 음식도 잘 하고 명필이며 낙화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작품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그래도 맥이 끊기지 않은 것은 누군가 낙화를 계속해 왔다는 이야기이겠죠.

“아마도 한동안 낙화는 집안으로 들어가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부녀자들이 바느질하다가 인두를 식히느라 나무에 문지르기도 하고 헝겊에 문지르다가 그림을 그렸을 수 있어요. 그리고 돈이 없는 서민들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어요. 사실 인두그림은 비싼 지필묵이 필요없거든요. 그렇게 200여 년간 낙화는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1820년 수산 박창규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빛을 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낙화의 시조라고 할까, 더 정확히 말하면 중흥조지요. 낙화의 틀을 잡고 비로소 회화로 인정을 받게 했던 첫 번째 인물이니까요. 그 무렵 낙화가 얼마나 유행이었는가 하면 장안의 사대부들 집안에는 모두 낙화 병풍 한 점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추사 김정희와도 가까우셨다는 분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추사보다 10여세 아래지만 추사가 이분에게 ‘화화도인火畵道人’이라는 당호를 지어주고 자신의 저서인 완당전집에 낙화의 기법을 극찬하는 글을 썼어요. 박창규의 그림이 대궐에도 알려져서 초청을 받았던 기록도 있고요. 그런데 이 분이 낙화를 가업으로 정착시키면서 낙화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1950년까지 150년간 밀양박씨 가문에서 이어져왔어요.”

-그런데 밀양박씨 후손이 아닌 분이 어떻게 낙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저의 스승은 전창진이라는 분인데, 이 분은 밀양박씨 후손으로부터 배운 분에게 다시 배웠다고 했습니다.”

-낙화를 배우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학창시절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화가가 꿈이었죠. 그런데 가정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미술쪽으로 몸을 담고 싶었어요. 지금은 디자인이나 공예 등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당시엔 갈만한 곳이 없었어요.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동아일보 광고란에서 낙화교습생을 모집한다는 작은 광고를 보았어요. 그때가 아마 1972년 봄이었을 거예요. 취업까지 보장한다는 말에 지체없이 달려갔지요. 낙화연구소는 청계천 삼일고가도로가 시작되는 부근의 장교빌딩 5층에 있었어요. 그곳서 처음으로 낙화를 보았지요. 교습소 정면에 붙어있던 산수화 한 점. 그 작품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보은에는 어떻게 오시게 된 것인가요.

“고향은 부여입니다. 여덟살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해서 서울서 학교를 다니고 낙화를 배웠지요. 그런데 낙화를 배우고 나니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큰 거예요. 돈을 벌어볼 셈으로 속리산으로 들어왔지요. 당시 속리산은 수학여행도 많이 오고 관광객도 많은 인기있던 관광지였거든요. 기념품 상점을 열고 관광기념품으로 낙화를 그리기 시작했지요. 그때 나이가 20대 후반이었는데, 어느새 60이 넘었으니 이제 보은사람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낙화의 도구가 불과 인두라는 것은 알았고, 재료는 주로 무엇을 쓰는지요? 또 기법은 어떤지?

“일반적으로 낙화의 재료는 구분이 없습니다. 종이, 나무, 비단, 가죽… 어느 것이나 불에 타는 것이라면 모두 그림을 그릴 수가 있지요. 그러나 저는 전통한지를 고집합니다. 원래 전통낙화는 한지에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지가 가장 어려워요. 표현을 섬세하게 하려면 종이가 가장 좋은데 까딱 잘못하면 타버리거든요. 기법은 전통 수묵화 화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붓 대신 인두로 표현하며, 먹의 농담을 인두로 지져서 나타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인두와 불을 다루는 손놀림과 농담을 표현하는 기술이 중요합니다. 열의 강약과 인두의 힘에 따라 검정색이 되기도 하고, 갈색이 되기도 하고, 여러차례 지지는 것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또 인두를 면으로 누르느냐, 세우느냐, 선긋기 색칠하기 손놀림에 따라서 수파문, 쇄찰법, 부벽준, 해색준, 은두준, 우점준 등 다양한 기법을 나타낼 수 있답니다.”

-주로 그리는 대상은 무엇인지요.

“대상도 수묵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전통 산수, 화조 등 동양화에서 그리는 소재는 다 다룹니다. 그 가운데 저는 주로 산수화를 많이 하지요.”

-작품 한 점 완성하는 데는 대략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이것도 대중없어요. 짧게는 1시간,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12폭짜리 병풍으로 재현했을 땐 꼬박 1년이 걸렸거든요. 문인화는 덧칠하기를 피하지만 낙화는 손질이 가면 갈수록 더 좋은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떤 점이 제일 힘들었나요.

“실력을 쌓아가는 단계에서, 누구나 벽에 부딪힙니다. 초보 때는 그래도 쉬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에 부딪히면 넘어서야 하는데 그런 벽을 여러 번 겪으면 넘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그림이 안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작품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시 작품에 몰입할 힘이 생기곤 했지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으니 이제 꿈을 이룬 것 아닌가요.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이번보다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을 때가 더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낙화가 관광지의 싸구려 기념품 정도로 취급을 받았거든요. 전시회에 출품을 하려해도 받아주지 않았고, 그게 예술이냐며 폄하하는 사회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제가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면서 비로소 낙화가 전통예술로 인정을 받고 날개를 달게 된 것이지요. 다시말해 음지에서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뒤 8년 동안 낙화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어떻게 하셨는지요.

“무형문화재가 되자 처음으로 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초청을 하더군요. 20일 동안 자리에서 단 1초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낙화 시연을 했어요. 낙화를 처음 본다는 많은 사람들이 ‘잘 그린다, 신기하다, 멋있다, 이런 그림 처음이다’라며 격려를 해줬어요. 그뒤 국내 시연은 물론 해외초청 기회만 있으면 쫓아다니면서 몸이 부서져라 낙화시연을 했습니다.”

-기억나는 해외 전시나 시연을 소개한다면.

“2014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아솔로비엔날레 초청을 받고 개막식 전야제 때 단독시연을 했는데 반응이 굉장했어요. 중국 상하이에서는 미술 전공학생만 5000명인 상하이예술대학에서 강연과 시연을 했는데, 공예교수와 총장이 직접 나와서 낙화를 과목으로 생각해보자고 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2014년 상하이에서 열린 한·중·일 공예명인전, 2016년 중국 닝보에서 열린 동아시아 문화도시 무형문화재대전, 태국 특별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전시 등 해외전시에도 많이 참가했었네요. 일반 미술작품들은 전시만 하는데 비해 낙화는 실제시연을 하면 뜨거운 연기가 나고 하얀 종이에 인두가 지나가면 그림이 되는 모습 등 현장감이 있어서 사람들이 매우 좋아합니다.”

-작가에겐 작품에 몰입할 때가 가장 힘들면서도 즐거운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작업은 주로 언제 하는지, 그 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요.

“맞습니다. 몇날몇일 동안 작품에 매달린 끝에 제가 원하는 작품이 됐을 때의 기쁨은 누구도 모르지요. 저는 인두가 그려내는 미묘한 색깔의 차이 때문에 주로 밝은 햇볕 아래서 작업을 합니다. 밤에는 주로 구상을 하고요. 그리고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취미로 산을 다닙니다. 운동도 할 겸 봄이면 나물을 뜯고, 가을이면 버섯도 따면서. 그리고 바둑을 두거나 가까운 지인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아 그리고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기도 하고요.”(한때 글쟁이가 될까도 했었다는 그는 ‘문학미디어’로 등단한 시인이다.)

-장인의 삶이 고단할 것 같습니다.

“장인은 미련해야 됩니다. 미련하지 않으면 절대 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약은 사람은 이익과 편리성을 찾아 떠나지요. 저도 20년 정도 됐을 때 굉장히 갈등을 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명예나 돈도 없는데 내 일생을 걸어야하나 고민했지요. 그런데 그동안 걸어온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끝까지 가보자 한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을 보면 거의 비슷해요. 약지 못하고 세상 시류에 어둡고 실리에 밝지 못하죠.”

-바람이 있으신가요?

“사회에 대해서는 바람이 없고요, 평생 원하던 국가무형문화재까지 됐으니까 이제부터 낙화의 계승과 발전은 죽을 때까지 저의 짐이고 의무입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 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국가무형문화재 136호 낙화장 보유자 김영조 씨.

그의 오늘은 그의 노력 외에 외롭고 힘든 외길 인생의 짐을 나눠온 가족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부인 함효숙(66)씨, 결혼한 큰딸 숙진(38·바이올린 전공)씨, 그리고 아버지 뒤를 잇고자 낙화공부를 해 전수장학생-이수자를 거쳐 전수조교가 된 둘째딸 유진(36)씨. 이들의 사랑으로 낙화는 전통예술로서 계속 우리 곁에 살아있을 것이다.

동양일보 상임이사·동화작가



■ 김영조 낙화장은…
* 1952년 부여군 구룡면 출생
서울배명중·고 졸업
* 1972년낙화연구소에서전창진씨에게낙화 사사
* 1977년대구동아백화점낙화개인전
* 1980년 보은으로 이주
* 1995년 일본 야마나시현 충북물산전 충북대표 참가
* 2003년일본 미야자키현 낙화전
* 2010년충북무형문화재22호 낙화장 지정
* 2011~17년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공예작가 워크숍
* 2012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한국관 전시
* 2014년 중국 상하이 공예명인전 ‘예용지미’
이탈리아 아솔로(Asolo) 비엔날레 전시 및 시연
* 2015년 대전 전통나래관무형문화재교류전‘교감’
* 2016년 중국 닝보시 동아시아 문화도시 무형문화재대전
보은군 자랑스런 군민대상 문화예술부문 수상
* 2017년 태국 동아시아문화도시 특별전
*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 낙화장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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