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 #언제부턴가 내게서 봄이 사라졌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날씨 탓일까, 아니면 뭘 해도 전과 같지 않은 나이 탓일까. 굳이 따지자면 후자 쪽이겠지만, 봄이 실종된 데는 날씨도 한몫 거들었다.

벚꽃이 지기 전에 거동이 불편하신 은퇴 사제를 모시고, 하루 봄바람을 쐬면 어떻겠냐는 지인의 전갈을 받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일정표를 보니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녀서 일단 거절은 했지만, 맘이 편치 않다. 그래, 봄이지. 출퇴근하면서 한 번쯤 곁눈을 주었어도 ‘벚꽃이 피었구나.’ 하는 정도는 알았을 텐데, 뭔가 소중한 것을 놓치며 살고 있다는 자책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우연한 자리에서 곤충을 전문으로 찍는 생태사진작가를 만났다. 국내는 물론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주로 동남아 지역의 곤충을 찾아다니며 생태 사진을 찍는 노작가가 국내 전시회를 앞두고 잠시 돌아와,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전시회를 마친 후 이번엔 미얀마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80대 노 작가의 사진에 대한 열정 자체도 대단하고 특별하지만, 가까이서 듣는 한 생의 철학도 여타 인문학 강의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다. 투박한 말투로 드문드문 들려주는 삶의 교훈은 질곡의 긴 세월을 정직하게 부딪으며 살아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우화(羽化)처럼.



‘우화(羽化)’란 한자 뜻 그대로 ‘날개’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成蟲)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리의 나비로 날기 위해서는 알이 유충으로 자라고, 애벌레가 몇 번의 변태(變態)를 거쳐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날개돋이‘의 화려한 변신으로 나비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허나 우화의 과정이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번데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자칫 날개가 찢기거나 그냥 매달린 채로 생을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불완전변태를 거듭해서 주어지는 날개의 삶이 고작 15일~20일이다. 생태 사진은 작품이기 이전에 생명의 기록이다. 우화(羽化)의 과정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이유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 녹아들어야 좋은 사진이 된다. 이틀을 꼬박 기다려 찍은 적도 있다고 했다.

젖은 날개를 말리고, 생애 첫 날갯짓으로 가지 끝을 떠나는 나비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경이롭다.

“백 세를 산다 해도 길지 않은 삶, 하루하루가 소중하기 때문에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우화의 순간을 지켜보는 기다림이 외롭고, 사진을 찍은 후에 몰려오는 적막감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다는 80대 노작가의 인생 고백이 담겨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진이고, 나를 외로운 오지(奧地)로 내모는 것도 사진이지만, 외로움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도 역시 사진이다.)



#봄은 ‘우화’의 계절이다.

언 땅을 붙들고 견뎌온 겨울이 끝이 나고 실뿌리로부터 전해지는 생명의 기운을 우듬지까지 밀어 올리는 봄의 변태(變態)가 시작됐다. ‘유유히/부드럽게/나풀나풀//그리고/앉았다//꽃이 아니다/풀도 아니다/싹도 아니다//당신의 굳은 어깨에//그래,/나비에게 꽃은/그대였던 것이다.’ ‘봄을 잊은 그대에게’란 청춘시집에 나오는 ‘나비’란 시의 일부다.

봄은 ‘날개돋이’를 통해서 진정한 비상을 준비하는 나비의 계절이다. 가톨릭 전례력으로는 ‘사순시기(四旬時期)’를 지나고 있다. ’다시 돌아봄‘을 통해 ’부활‘의 희망을 키우는 시기다.

우화의 본질은 ’새로 남‘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허물을 벗어 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날씨 탓, 나이 탓하지 말고 생명력 넘치는 ‘우화의 봄’을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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