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4.19학생혁명의 시발점은 청주공고 2학년생이 주도한 4.13 시위다"

2010년 50주년 4.19혁명기념사업회가 청주공고 교문 옆에 세운 4.19혁명의 진원지 비문.
2010년 50주년 4.19혁명기념사업회가 청주공고 교문 옆에 세운 4.19혁명의 진원지 비문.

 

(동양일보 이종억 기자) 4.19혁명은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타도한 학생민주혁명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인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내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선정했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아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신 통치토록 했다.

3.15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었지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은 어려웠다. 자유당이 장기집권한데다 부정부패를 일삼자 국민들 상당수가 정부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조직적인 부정선거운동을 벌였다.

1960년 3월 7일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박사 지원 유세차 청주를 방문한 박순천여사는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연설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부정선거 음모를 폭로했다.

실제 선거일 전에 투표하기, 3~9명씩 묶어 공개적으로 투표하기, 투표함 바꿔치기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 3.15부정선거가 벌어졌다.

당시 청주공고 2학년생이던 김태형(78·보은군 산외면 중티리·당시 이름 김연웅) 씨는 4월 2일 동기생 강권원(78)·곽한소(78)·김영한(77)·이영일(77) 씨와 의기투합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모의했다.

이들 5명은 4월 3일 다른 동기생 박노경, 오종석, 이현찬, 김정호, 이해우, 오병화, 노창은, 김연옥, 우일제를 비롯해 1학년 김용길, 김지학, 김택현 등 15명 정도를 설득했다.

청주공고생 1~2학년 20여명은 청주시 수동 213번지 김태형 씨의 자취방에 모여 10일 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준비했다.

또한 청주공고 시위 주동자 5인은 청주시내 각 학교 3학년 선배와 동기생들을 찾아다니며 4월 13일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당에서 3.15부정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했으니 그 결과를 지켜보고 결정하자며 한 발씩 물러섰다.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노트를 찢어 전단지를 만들고 재학생들과 각 학교 간부들을 찾아가 나눠줬다. 글씨를 잘 쓰고 그림 솜씨가 뛰어난 김용길과 김지학, 김택현은 4.13거사를 알리는 대자보를 만들어 교내 곳곳에 붙였다. 팻말은 물론 플래카드와 머리띠는 없었다.

4월 13일 마침내 청주공고 2학년을 비롯한 재학생 200~300여명은 청주역 광장에 모여 ‘3.15부정선거는 무효다. 선거 다시 하라’와 ‘자유 민주 정의’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청주공고 2학년생들이 주동이 된 이날 청주학생시위는 충북 4.19학생혁명의 출발점이자 도화선이 됐다.

4월 16일은 청주공고 운동장에 충북지역 군입대자들이 논산훈련소로 가기위해 집결하는 날로 청주공고 2학년생들은 입영장정들이 동조해 줄 것으로 믿고 시위를 시작했다. 2학년을 선두로 1학년과 함께 약 500여명이 청주역전을 지나 북문로로 달려갔다. 그러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해산됐고 시위 과정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으나 2시간여 만에 훈방 조치됐다.

청주 장날이자 일요일인 4월 17일 정오엔 시민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믿고 청주중앙공원에서 청주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했다. 하지만 사전에 누군가의 밀고로 시위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경찰기마대의 강력한 저지를 받고 시위는 무산됐다.

4월 18일은 청주공고 전교생을 비롯해 각 학교 학생들이 청주상고 운동장에 모였다. 청주공고 3학년 최무웅·오성섭 씨의 협조로 청주공고생 1000여명과 청주상고생 1000여명 등 2000여명이 도청과 경찰서 방향으로 몰려가며 시위를 벌였다.

청주농고와 청주고, 청주여고는 이날 교문을 굳게 닫아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시위대들은 북문로 철길 후미길(지금의 동신약국 자리)에서 기마경찰에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때 다수의 학생들이 연행됐으나 문학봉 당시 경찰국장의 훈계를 듣고 그날 밤 모두 석방됐다.

4월 19일에는 경찰이 청주공고를 둘러쌌기 때문에 정작 청주공고생들은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시위에 참가했다는 청주공고생들이 있다면 모두 거짓말이다.

김태형 씨는 “청주상고도 18일 하루 시위에 참가했을 뿐이고, 19일 오전에 청주농고가, 오후에 청주대학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보은 이종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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