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운용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우선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려 했으나 일본의 반대가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단호하게 바꾸어 버린다.

이어서 고종은 1897년 9월 27일부터 왕의 호칭마저 황제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까지 마치게 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버티지 못하고 조선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천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다 박았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민족적 수모를 벗어버리는 날이기도 하였다.

드디어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내용은 관보에 발표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본은 물론 러시아와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고 영국과 미국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한제국을 승인하지 않고, 조선 군주가 감히 ‘황제’를 운운한다며, 청일전쟁의 패배에 이어 또다시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였다. 대한제국은 국가공동체로서 민족 자결을 국내외에 거듭 천명하며 우리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세계에 내세웠다.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민족 자결의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위협으로 고종이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에 도장을 누름으로써 치안권이 사라지게 되고, 8월 22일에는 재정권이,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한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부당성(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해 완강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고, 일본 헌병의 폭력개입과 일본 관리가 국새를 꺼내 찍음)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회의장에도 들어서지 못한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 들어섰다. 총독은 모두 무관 출신으로 일본 군부의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이들은 일본 내각의 총리대신이었던 자가 부임해오거나 총독이었던 자가 총리대신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총독은 일본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아니하고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등의 모든 권한을 일본 황실로부터 받아왔다.

일본 군벌 출신의 총독들은 조선에 오자마자 마치 제왕처럼 행동하며 백성들을 억압하고 수탈을 일삼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힘입어, 기미독립 만세운동이 터지게 된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시인이 만들었다. 당시 그는 홍명희,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대 천재'로 꼽히던 인물로 도쿄 유학을 통해 신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출판과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초안을 마무리한 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길 원치 않아 서명을 꺼리고 있었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나선다. 독립운동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에게 선언서를 쓰게 할 수는 없다며 자신이 선언서를 쓰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선언서는 마무리되었으므로 한용운이 여기에 공약 3장을 덧붙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미리 연락해둔 종로 경찰서 형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후에 스스로 영어의 몸이 되었듯이, 너무나 의연하고 광명정대한 행위였다. 이에 앞서 2월 26일 ‘보성사’에서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28일에 천5백여 장이 학생들 손에 쥐어졌다.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온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끓고 있던 민족 자결의 기름에 불이 그어졌다. 지상 최고의 민족독립의 염원을 담은 명문장을 쓴 최남선은, 3·1 운동의 주동자로 지목, 체포돼 2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1927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시작으로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제국이 패망 후, 1945년 9월 3일 38도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게 넘기고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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